전설/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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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기장사 보내라'라는 말의 유래
    옛날 어느 고을에 노부부가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4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아들 ‘만득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본 아들이라 금이야 옥이야 길러내어 너 댓 살이 되니깐 재롱을 부리는데 얼마나 귀엽고 이쁘겠습니까. 아들이 재롱떠는 것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하며 영감이 아들에게 “너희 어머니 한번 때려라.” 하니깐, 또 할멈은 “너희 아버지 한번 때려라.” 하고 다시 시키면서 아들이 번갈아 가면서 어메 아베를 장난삼아 때리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아들은 때리는 것이 습관화 되면서 걸핏하면 부모를 때리게 되었고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도 부모를 쳤는데 그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었습니다.날이 갈수록 부모들은 늙어 힘이 부치는 형편이나 아들은 한창 청년이라 힘이 강성하다 보니 이렇게 계속 되다가는 아마도 아들한테 맞아죽을 것만 같아서 아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집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 같아 노부부는 아들에게 장사를 시키기로 했었습니다.여기서 얼마 안가면 영광 법성포가 나오니깐 거기 가서 조기를 도방으로 떼어다가 마을 곳곳을 지고 다니며 파는 조기행상을 하도록 하고는, 지금까지 모아둔 돈과 이웃에서 빌린 돈을 합하여 20냥을 주며 “너도 이제 스물이니 네 앞길은 네가 열어나가야 한다.”며 장사를 떠나도록 하였는데. 만득이는 조기 상자를 등에 걸쳐 메고 “조기 사시오. 조기 사시오.”를 외쳐대며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녔습니다.이렇게 생조기를 메고 팔러 다니는데 만득이가 사람이 될라고 그랬는지 좋은 청년 한사람을 만났어. 한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건장한 청년이 “여보시오. 조기 있소.”하고 부르더니 조기 중에서 굵은 놈으로 다섯 마리를 샀습니다. 만득이는 조기는 팔러 다녀도 어떻게 요리하는지는 잘 모르는 형편이라 그 청년이 어떻게 하는가 보려고 한번 뒤따라 가봤습니다. 늙은 양친을 모시는 그 청년은 조기를 사들고 부엌에 와서는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조깃국을 끓여 부모님께 차려드리고는 부모님이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밥상 앞에 엎드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맨 날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한 만득이는 그제서야 사람이 사는 것이 이런건가 보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 만득이는 나머지 조기를 떨이하라고 하는 요청도 뿌리치고 팔다 남은 조기를 그대로 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기까지 남기고 예상보다 빨리 집에 돌아온 아들을 본 부모는 반가움보다는 또 아들의 행패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가 걱정이었습니다. 부모들은 속으로 벌벌 떨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다짜고짜 행장을 풀더니 팔을 걷어 부치고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쌀을 씻고 조깃국을 끓였습니다.이윽고 밥상을 성대하게 차려서 안방에 들고가서는 부모님께 드리고 진지를 드시는 동안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행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더욱 불안해진 노부부는 ‘이제 요놈이 잘 먹여가지고 우리들을 저 세상으로 내보내버릴 모양이다.’고 생각하니 당체 목이 메어 밥이 통 넘어가질 않았습니다.그럭저럭 밥숟가락을 떼고 나니 아들 만득이가 “어머님 아버님 진지 맛있게 드셨습니까? 저도 이제는 새사람이 되어 효자노릇 한번 해보겠습니다.”하며 자기의 지금까지의 경험담을 쭉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몹쓸 짓만 하던 자식이 천하에 없는 효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든다, 효자를 만든다는 뜻으로 ‘조기장사를 보내라.’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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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꾸 아들의 부모봉양 설화
    옛날에 아이를 12명이나 낳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많지 먹을 것은 없지 하여 모시고 사는 노모는 맨날 먹을 것이 부족하여 누룽지나 감자, 고구마가 고작이었고 이러한 것들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노모는 항시 입에 오른 소리가 '내 죽기 전에 소고기 두 점만 먹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 정말 원이 없것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들은 능력이 모자라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항시 마음에 걸려 죄인처럼 지내오기를 수년째 아들은 드디어 큰마음을 먹고 그동안 조금씩 모아둔 돈 꾸러미를 가지고 고기를 사기 위해 읍내의 5일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장터에 나가니 이 마을 저 마을에 사는 친구와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여기저기서 '한 잔 하세 한 잔 하세’ 하는 통에 대낮부터 상당한 공짜술을 얻어마시게 되었습니다.벌써 거나하게 술이 취하게 되었지만 오늘 시장에 나온 목적이 어머니께 드릴 고기를 사러 왔기 때문에 그 양반은 정신을 가다듬고 푸줏간집으로 가서 살코기 한 근을 사서 잘 싸서 지팡이에 매달고는 강진 도암에 있는 초분거리(초분이 있는 곳) 또는 솔대거리 (솟대가 있는 곳)라고 불리는 고개를 넘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넘어설 무렵에는 해가 떨어져 사방이 어둑어둑 하였습니다. 왠지 오싹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뒤에서 뭐가 달려들면서 지팡이에 매단 고기를 나꿔채어서 도망을 가는 겁니다.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상황에서 그 양반은 “저 놈 잡아라! 거기에 놓지 못하겠느냐” 소리소리 쳐댔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따름이었습니다. 얼핏 이상한 물체의 형국을 보니 상반신은 안 보이고 아랫도리가 매우 긴 사람이었습니다. 몇 년을 벼르고 별러서 사 온 고기를 졸지에 도깨비귀신에게 빼앗기고 낙심 천만하여 털레털레 집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낮에 샀던 고기를 싼 종이가 분명하고 그 옆에서는 노모가 그 고기를 날로 베어서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또한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요리를 할 틈도 없이 날로도 그렇게 맛있게 드시는 것일까? 아들은 자기 어머니께 무슨 영문인지를 물어보니 좀 전에 부스럭 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 마루에 뭐가 올려져 있길래 뜯어보니 그렇게 먹고 싶던 고기여서 너무 반가워 먹게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남은 고기마저 다 먹고 나더니 느닷 없이 "아야! 내 희미하던 눈이 밝아져서 저기 저 참새골이 훤하게 보이는 구나”하는 겁이었습니다. 아들은 고기를 직접 전달해드리지는 못하였어도 어머니께서 고기맛 보실 수 있게 되었고, 더구나 시력이 회복된 데에 있어서는 조그마한 위안을 삼을 수 있었지요.모자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마루에 쌀가마니, 소고기, 돼지고기가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아들은 별 이상한 일이 다 있다고 의아해 하며 필시 누가 집을 잘못 알고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고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누가 혹시 저희 집에 쌀과 고기를 가져다 두지 않았느냐며 일일이 물어보았으나 전혀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이날 저녁 늙은 어머니가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어떤 귀신이 나타나서 “이 보시오! 나는 조금 전에 왔던 귀신인데 당신의 아들이 하도 효자여서 내가 오늘 저녁 당신 집에 넉넉한 재물을 가져다 줄 것이니 당신만 알고 절대 입 밖에는 내지 마시오” 귀뜸을 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른 체 시치미를 떼고는 그럴 때마다 아들에게 왠 물건이다냐고 물었습니다. 이후로도 쌀과 고기가 떨어질만 하면 도깨비귀신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달되었답니다. 결국 지극한 아들의 효성에 감복되어 고기를 많이 먹고 싶다는 모친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고, 지난 장날 고갯마루에서의 고깃덩이를 빼앗기게 된 것도 단 몇 시간이라도 어머니께 고기맛을 빨리 보여드리기 위한 도깨비귀신의 조화(造化)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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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장수와 어머니 설화
    옛날에 소금장수 아저씨가 있었는데 하루는 안골이라는 마을을 찾아가 이집 저집 다니며 소금을 팔다 날이 저물게 되어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하룻저녁만 묵을 수 없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나이 지긋한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그 집에서 재워드리고는 싶으나 마땅한 방이 없어 곤란하다고 하니까, 소금장수는 사정을 하면서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어머니 방에서라도 재워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에서는 하는 수 없이 허락을 하였고 어머니와 소금장수가 한 방에서 자게 되었고 처음에는 무슨 일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지만, 막상 나이가 든 사람들이지 만 남녀가 한 방에 있게되니까 서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부스럭거리고만 있었습니다.드디어 소금장수 영감이 용기를 내어 늙은 아주머니에게 “참 보름달이 밝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고 계십니까” 하니 그 아주머니는 “아저씨도 안 주무셨어요. 오늘저녁은 공연히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이 잘 안 오네요” 하며 수십년만에 이렇게 마음이 들뜨기는 처음이라고 하면서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곤소곤 나누었제.두 사람이 어느새 마음이 동하였던지 소금장수 영감의 몸은 점점 아주머니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영감의 팔이 아주머니의 몸에 닿으니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 놓았는데 영감은 금새 팔을 다시 올렸고 아주머니는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습니다. 점차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다가 소금장수는 아주머니를 덥썩 껴안아버렸어요. 소금장수는 늙었지만 고운 자태의 아주머니에게 홀딱 반하였고 아주머니도 수십년 동안 잊고 살았던 남정네의 체취에 정분(情分)이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밤새도록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고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밤을 보내고 나서 소금장수는 자신의 본업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마을을 향해 훌쩍 떠났는데, 이 늙은 아주머니는 모처럼 느꼈던 지난밤의 여운을 끝내 잊지 못하고 아쉬워하면서 아들을 불러서 ‘그 소금장수는 어디로 갔느냐? 제발 좀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달라'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을 들은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장수를 찾아 집을 나서게 되었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소금장수의 행방을 물었고 이웃마을에 도착하여서 여러 집을 다니며 행방을 수소문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오래 전에 이 마을을 다 돌고 이미 다른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고 일러주자 모자는 황급히 이 마을을 빠져나와 옆 마을로 지나는 고갯길로 달려갔습니다. 고갯길 어딘가로 가고 있을 소금장수를 찾기 위해 아들은 어머니를 고개 길목에 앉혀놓고 혼자 이러저리 숲길을 뒤지면서 나아갔습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소금장수의 행색을 발견하고는 '아저씨 아저씨’하면서 저만치 가고 있는 소금장수를 불러대어 걸음을 멈추게 하고는 이만저만 해서 저희 어머니가 꼭 한번만 뵈었으면 한다고 하면서 소금장수를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고갯길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그 어머니는 아들이 소금장수를 데려오는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엎어져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기력이 쇠약한데다 날씨가 너무 무더워 이것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라쳤기 때문으로 아들과 소금장수는 조금만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사람은 비통해 하면서 어머님이 불쌍하게도 이곳에서 돌아가셨으니 어머님을 기리는 뜻에서 이 자리에 땅을 파서 무덤을 만들기로 하고 가까운 마을로 가서 삽과 괭이를 가져 다가 곱게 안장을 해드렸습니다.그런데 이 아들이 어찌나 소자(효자:孝子)여서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는데 중간쯤 파내려 가니까 누런 금덩이가 수북히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슬픈 가운데서도 이렇게나 많은 금붙이가 나오자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으나, 살아 계실 때 이것이 나왔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잘 모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설움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옆의 소금장수는 '아드님의 심덕이 하도 좋아서 어머님이 마지막 가시면서 주신 선물인갑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고 이것으로 밑천삼아 전답도 장만하고 좋은 처자 만나서 살림차리고 열심히 사는 것이 어머니를 받드는 길'이라며 금덩이를 돌아가신 양반 아들의 살림에 보태쓰라고 하였어.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께서 아저씨를 찾으려다가 이렇게 횡재를 한 것이고 더구나 우리 어머니를 장사지내는데 아저씨께서 힘을 보태주셨는데 그 공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하며 금덩이의 절반을 뚝 떼어서 소금장수에게 주었어요. 심덕이 좋은 아들은 효성 덕분에 그리고 소금장수는 운이 좋은 탓에 생각지도 않은 귀중한 재물을 얻어 되어 잘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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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부개가 허락의 이유
    지나간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잘못된 일 가운데서도 가장 잘못된 것이라면 청상과부라 하여 젊어서 홀로된 부인들을 절대 개가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옭아맨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육신을 가진 여인네들이 평생 아무런 낙이 없이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정말로 심한 경우는 혼인하기로 약속하여 사주단자만 보내와도 여자는 남자 측의 식구로 간주되어 혼인을 치르기 전에 남자가 급서(急逝)해도 여자는 시댁으로 가서 평생 수절하며 살다가 그 집의 귀신이 되어야 했으니, 육신으로는 숫처녀인데 기혼자 취급을 받으며 한을 안고 산 것이었습니다. 과부의 개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부자양반 댁에 시부모와 며느리가 살고 있었습니다.양반 댁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더니 성장하여서도 맨날 잔병치레가 끊일 날이 없었고 어렵사리 장가는 들여놓았는데 장가 간지 일 년도 못되어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법도가 며느리의 개가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위하여 후원에다 별채를 하나지어 기거하도록 하고 수시로 보살펴주었지요.그 때는 보쌈이 있어 혹여 싸가지나 않을까 또 동네의 젊은 남자들이 넘보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시아버지는 하루저녁이면 너 댓 차례의 순행을 치기도 하였습니다.별채로 보낸 지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봄날 시아버지는 여느 때와 같이 후원으로 가서 며느리가 별일 없는지 둘러보며 갔는데, 며느리방에서 도랑도랑하는 소리가 들려 가까이 가보니 왠 남자와 며느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였습니다.며느리- “ 여보. 뒤뜰에 복사꽃이 너무 화사하게 피었어요. ”신 랑- “ 어. 그래. 벌써 사월이 되었는가보군. ”며느리- “ 우리 손잡고 꽃나무사이를 걸으면서 꽃향기에 취해봐요. ”신 랑- “ 아 당신의 향기와 꽃의 향기 벌써 취하는데 ”며느리- “ 이럴 때 운치있는 시 한수 읊으면 그만 이것어요. ”신 랑- “ 이화-에—월-백—하고 은한---이---삼경인제--- --------------------------------------- ”며느리- “ 아. 당신 언제 그렇게 좋은 시를 배웠어요. ”신 랑- “ 이 봄날 어울릴 것같아 한번 읊어보았소. ”며느리- “ 우리의 젊음도 늙지 않고 항상 봄날이었으면 좋것어요. ”신 랑- “ 아무렴. 우리 늙지말고 천년만년 살아봅시다. ”며느리- “ ------------------------------- ”신 랑- “ ------------------------------- ”[두 사람의 대화는 그칠 사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데 때로는 웃음꽃이 피다가 때로는 진지하게 바뀌다가 하면서 엿들어도 흥미있는 내용이었다.]   시아버지는 잔뜩 긴장하여 머릿속에서는 정숙하던 며느리가 도무지 그럴 리가 없닥 부인하면서도 살금살금 헛간으로 걸어가 길다란 작대기를 들고 며느리방 앞에서서는 “아가야! 너 지금 누구랑 그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고 물으니 며느리는 “예! 아버님. 아무도 없사와요. 잠은 안 오고 하도 무료해서 혼잣말을 해 본 거예요”하는 거였습니다.과연 방의 문을 열어놓고 보니 세상에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올 ‘골베개’를 신랑처럼 옆에다 놔두고 혼자서 1인2역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이런 광경이 너무 가엾고 측은하게 생각되어 방안으로 들어가서는 며느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며느리를 위로하였습니다.“아가야!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니 신랑을 잃고 얼마나 외로웠느냐. 그런 속사정이 있었으면 진즉 후련하게 원정이라도 해 볼 것이제. 혼자서 네 속만 다 곯았구나.”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달래고 나온 후로 몇날 며칠을 고민고민 하다가 홀로된 젊은 며느리를 집안에 묵혀두어 썩히면 과연 얼마나 득이 될까 싶어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그리하여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안방으로 불러 “얘야! 나도 여러 날을 생각했다. 내가 억지로 너를 붙잡아 둔 것도 아니고 세상의 법도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저번 날 밤의 광경을 보고 나도 많이 깨달았다. 나라의 법을 어긴 것이 죄가 된다면 그 대가는 내가 받을 터이니, 너는 개의치 말고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새 출발을 하도록 하여라. 지금까지 우리 집을 지켜준 것만 해도 너무너무 고마웠다.”며 굴레 같은 시집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개가하여 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개가가 허락되기 시작한 것은 어느 며느리의 ‘골베개’ 대화 사건이 생겨난 이후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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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장(高驪葬)이 없어진 까닭
    옛날에는 먹을 것이 귀한데다 식구 수마저도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노인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거동을 제대로 못하고 병치레를 하게 되면 산에 내다버리는 흔히 ‘고름장’으로 불린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도리로서 자기의 부모를 내다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주 오래 전에는 드물지 않게 행해진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지요. 말하자면 자손들을 위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이 희생되어주는 인륜도덕에는 어긋나지만 불가피한 측면도 있는 전래의 풍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어느 고을에 최생(崔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늙고 거동이 불편한 자신의 어머니를 다른 사람들처럼 동구 밖 한적한 곳에 땅을 파서 고려장을 시켜야 될 것 같았으나 차마 자신은 낳아준 노모를 매몰차게 집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습니다. 다른 방책으로 자기 집 마루의 판자를 뜯어내고 그 아래를 깊이 파서 흙방을 만들어서는 그 안에 노모를 모셔두고 수시로 먹을 것을 넣어드리고 수발을 하며 문안을 올렸지요. 다만, 마을사람들이 노모의 소재를 물으면 의아하게 여길까 보아서 관가에는 자신의 노모를 고려장 시켰다고 신고를 해놓았습니다.그러던 차에 나라에서 전국에 방(榜)을 붙여 놓았는데, 매우 미세한 크기의 구슬을 실을 꿰어 목걸이를 완성해 내는 사람이 있으면 10만냥에 이르는 엄청나게 큰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이 방을 읽고 나서 엄청난 상금액수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군침을 삼켜대었으나, 한편으로는 굵은 바늘구멍크기도 안 되는 작은 구멍인데다 구슬 안의 구멍이 직선이 아니라 세 번 이상 돌아나가는 소용돌이 형태여서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어려운 과제였습니다.최생도 이 방을 보고 자기가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내면 10만냥이라는 거금을 탈 수 있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하루아침에 털어 버릴 수 있는 것과 동시에 가난이라는 죄 아닌 죄 때문에 하고 있는 고려장이라는 몹쓸 짓도 그만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몇날며칠을 이 궁리 저 궁리 다 해보아도 이렇다 할 뾰족한 방법이 도무지 나오지 아니 하였는데, 불현 듯 세상살이를 많이 하셨고 바느질일에 능숙한 자신의 노모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아들은 즉시 노모에게 달려가 “어머니! 이만저만해서 구불구불한 구멍이 뚫린 구슬을 꿰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것 같은데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노모는 한참을 궁리하다가 “아가야! 네가 우리 집안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니 그 성의가 가상하구나. 내 생각에는 구슬의 양쪽 구멍중의 한 쪽 구멍중의 한 쪽 구멍주위에 꿀을 발라놓고는 몸집이 작은 개미 한 마리를 잡아 그 뒷다리에 실을 묶어서 꿀을 바르지 않은 구멍에다 집어넣으면 이 개미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반대편 구멍 쪽으로 기어갈 것이 아니야. 러면 자연히 힘들이지 않고 구슬을 아주 가는 실로 꿸 수가 있을 것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아들은 노모의 기발한 생각에 무릎을 탁 치며 “과연 우리 어머니십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척척 알아내십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그야말로 비장의 구슬 꿰는 방법을 알아낸 아들은 한양의 조정에까지 나아가 자신이 완벽하게 구슬을 꿰어낼 수 있다며 몇월 며칠까지 완성해 오겠다고 구슬재료를 받아가지고서 돌아왔습니다. 과연 노모의 말대로 시행해보니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처럼 술술 작업이 진행되어 약조한 날짜에 무사히 조정에 납품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웬만큼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어려운 과업을 완수할 수 없을 터인데 이렇게 쉽사리 해내는 것에 대하여 놀라워하며 시상식을 하는 자리에서 상금수여와 함께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습니다.왕은 최생에게 친히 술을 따라주며 어떻게 구슬을 꿸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최생은 거짓으로 고려장을 시켜놓았던 자신의 모친이 구슬을 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이렇게 쉽게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며, 남들에게 말로만 고려장을 하였다고 했지 실은 자신의 집 마루 밑에 모셔두고 부양해 왔다고 실토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두 번이나 놀랐는데, 우선은 늙은 노인이라면 먹을 것이나 축낼 뿐이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쯤으로 지금까지 생각해 왔으나 그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노인들의 오랜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혜를 후세들이 훌륭히 계승시키면 보이지 않는 좋은 재산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었습니다.둘째로는 아들의 지극한 효성이었는데, 고려장이 당시에는 별로 흠이 될 것이 없는 일반적인 풍습이었지만, 아들은 인간적인 윤리상 차마 자기의 모친을 내다버릴 수 없어서 당시 시속(時俗)을 따르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자신의 도리를 다한 것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이러한 일을 계기로 국왕은 마치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백 년 이상 지속되어온 인륜강상(人倫綱常)에 어긋나는 불합리한 제도를 즉시 폐지하도록 명하여 이때부터 고려장(高驪葬)이라는 악습이 사라지면서 노인을 공경하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면모가 살아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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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보같은 신랑 설화
    옛날 광주 북쪽고을의 어느 마을에 바보 칠푼이 같은 조금 모자라는 ‘밤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장가가기가 힘들었지만 글히도(그래도) 전에는 남자가 대우받는 세상이어서인지 여염집 처녀한테로 장가를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다들 나이가 어려서 혼례식을 올렸기 때문에 혼인을 하고 나면 신부가 곧바로 시댁에 가서 시댁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적게는 서너달 길게는 일 년 정도 심지어는 이 년 이상까지도 신부가 친정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신부 믹히기(신부 묵히기)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신부가 친정에 있으니까 신랑이 처갓집에 한 달에 한번 꼴로 재주로(자주) 다녀오고는 했습니다. 이 밤쇠라는 바보청년은 처갓집을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세 번차까지 갔다 와도 맨날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처갓집 동네이름이 희한하게도 ‘염통' 이라는 곳이었는데, 바보신랑은 도랑만 한번 건너도 잊어먹고 힘든 고개를 한번 넘어도 잊어먹어 한참 가다가 생각이 잘 안 나면 오던 길을 되짚어 가서 물어보기 일쑤였습니다. 음력 '오월 어느 날 바보신랑은 처갓집에 다녀오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 날은 잔뜩 긴장을 하여 동네이름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을 하여 가고 있는데 초반에는 어떻게 잘 넘어갔으나 노정의 절반쯤을 지나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도랑을 뛰어 넘는 순간 지금까지 그렇게 어렵게 기억해 온 '염통'이라는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 '대통’ 아닌데 '배통’이것도 아닌데” 이것 저것 주워섬겨 봐도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힘들여서 절반 이상이나 와버린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지요.바보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한 것이 물속에서 뛰어 노는 어미개구리한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개굴아! 여기서 시오리쯤 가면 나오는 동네이름이 뭐대(무엇이대)” 하니 “음. 아마 ‘꽥꽥’이라는 동네일거야. 분명하다구” 개구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바보신랑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이름이 아니었어.'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맞은편에서 지나오는 늙은 영감을 만나 개구리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영감은 안됐다는 표정으로 원 세상에 자기의 처갓집 동네도 모르는 한심한 사람도 있느냐고 책망하며, 대뜸 “에이! 염통 빠진 사람 같으니라고”라고 쏘아붙였습니다. 바보신랑은 비록 힐책은 받았지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리자 “그래 맞아 ‘염통’이라는 마을이었지. 내 머리도 보통 수준밖에는 안 되나봐. 왜 이제야 생각이 나는 거야" 자책을 하면서도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면서 단숨에 처갓집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처갓집에 들어선 즉시 마느래(마누라)를 찾아보니 마느래는 없고 자기 쟁인(文人)어른이 볏짚으로 용마름을 엮어 초가지붕을 잇고 있으니 이 바보사위가 고생허신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쟁인은 인사를 받고 곧 일이 끝나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해도 사위는 막무가내로 지붕위로 올라가 힘써서 엮어놓은 새이엉을 망가뜨리고 내려 왔습니다. 사위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장모님이 안보이니까 “장모님 저 왔습니다. 어디에 계신가요.” 크게 외치고 다니니 그때 마침 뒷간에 들어가 있다 장모는 적이 난감하였지만 “여보게! 왔능가. 나 뒷간에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소” 하며 대답하였습니다. 이 막무가내 사위는 웃어른에게는 도착 즉시 지체 없이 인사드리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느냐며 벌떡 뒷간 문을 열고 들어가 장모님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장인 장모 모두 뵈었으니 그러니까 이제는 마누라 볼 일만 남아있지요. 장모님께 마누라 행방을 물으니 마누라가 방안에 자고 있다고 하여 안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마침 방 한쪽에는 언제 쑨 죽인지는 몰라도 식어있는 죽 한 종지가 놓여 있길래 바보신랑은 어여쁜 신부에게죽을 멕이고(먹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바보신랑은 귀동냥으로 음양의 이치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바로는 여자들은 입이 두 개나 있어 아무데로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혹여 잠이 깰까봐 조심스레 이불을 들춰낸 후 마누라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아랫도리에 죽을 떠넣고 있는데, 잠결에 마누라가 피식 방귀를 뀌자 그 신랑이 하는 말이 글씨(글쎄) “여보, 마누라! 엊저녁에 쑨 죽이니 불지 말고 묵소” 하였다지요. 옛날에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길혼(결혼)하는 시대니까 나올 법도 하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우습지도 않는 우스운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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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소저(柳小姐)의 환생
    옛날 광주고을에 유소저(柳小姐: 소저는 아가씨라는 뜻의 한자어)라는 처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를 병환으로 잃고 아버지가 새로 계모를 맞이하여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재혼으로 처녀장가를 들게 되었으나 계모의 나이가 젊어 계모의 시샘과 강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관직에 있는 부친이 가정사는 별로 챙기지 않는 것을 기회로 계모엄마는 틈만 나면 전처소생인 유소저를 없애버릴 궁리만 하여 번번이 밥에 독약을 묻혀 주곤 하였으나 낌새를 알아차린 소저의 유모가 그 밥을 주지 않아 화를 면하였습니다. 한번은 유소저의 유모가 독성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이상한 밥을 개한테 주었는데, 그 개는 먹자마자 죽어버렸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비상(砒霜)처럼 무서운 극약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계모는 아무래도 유모가 중간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유모를 내쫓아버렸습니다. 이후에 계모는 자신이 해다 주는 밥을 전처의 딸이 잘 먹지 않자 크게 걱정하는 척 “얘야, 밥을 잘 먹어야지. 그렇게 게직게직 하며 통 먹지 않으면 어떡하니. 그렇게 입맛이 없으면 미음이라도 쑤어다 주렴.” 하였습니다.그리고 계모는 정말로 쌀을 갈아서 미음을 끓여다 주었고 이때 계모는 몰래 독약을 타 넣고 새로 입맛을 찾으라고 쑤어주는 죽이라 덥썩 먹어대겠지 하며 속으로 고소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모의 간교한 흉계를 이미 알고 있는 유소저는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데도 죽을 안 먹는다고 하면 자신이 계모의 흉계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날까봐 죽을 그대로 둘 수는 없어서 웃옷의 가슴속에 가죽주머니를 몰래 매달아 먹는 척하며 죽을 부어 담아버렸습니다.유소저는 짐짓 태연해 하며 “새어머니. 새어머니께서 정성껏 쑤어 주신 미음죽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신경을 많이 안 쓰셔도 되는데 아무튼 고맙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계모는 속으로 ‘꼴도 보기 싫은 년. 이년이 제대로 죽을 먹었으면 오늘저녁도 넘기지 못하겠지. 오늘만 지나면 눈엣가시처럼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지고 서방도 서방의 재산도 다 내차지가 될 거야. 아이 고소해. 아이 고소해. 이제는 모든 것이 내 세상이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그러나 이게 무슨 일일까? 곧 죽을 것으로 생각했던 전처 딸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너무도 멀쩡하였고, 한참 후에야 계모는 유소저의 지략이 자신보다 한 단계 앞서 있음을 깊이 깨달고 더 이상 얄팍한 간교로는 안 되겠다 싶어 정공법(正攻法)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한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전처의 딸이 방년 17세가 되어 이웃마을 사대부가의 도령과 혼사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계모는 몇 번의 독살시도를 실패하여 증오심이 가득 찬데다 지체높은 양반집 며느리로 들어가 거드름을 피우는 꼴은 더더욱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혼인 첫날밤 암살계획을 비밀리에 꾸몄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거짓 표정을 지으며 혼례식을 치러낸 계모는 은밀히 계획을 진행시켜 나아갔는데, 저녁 시간에는 일부러 일가친척을 붙잡아 밤늦도록 놀다가 가도록 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헛간 한켠에서는 몸종 ‘덕순이'를 남장시켜 날이 퍼렇게 선 비수(北首: 단검)를 쥐어주고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거사 전에 이미 계모는 몸종에게 입힐 남자 옷을 준비해서 입혀보는 등 치밀한 준비까지 마쳤습니다.축하하객들도 다 떠나고 계모부부는 신방에 들어간 새부부에게 좋은 꿈 많이 꾸고 행복한 시간을 가지라는 인사말을 하고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후 자정을 넘긴 시간에 거사를 치르기로 계모와 몸종사이에 약속이 되어있었던 바, 드디어 거사의 시간이 다가오자 몸종 덕순이는 살금살금 헛간을 빠져 나와 신방 앞으로 향하였습니다. 가만히 방안의 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두 사람이 잠이 들지 않고 신랑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으나 신부는 부끄러워서 아무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는 것 같았습니다.덕순이는 숨을 멈춰 마음을 가다듬고는 용기를 내어서 신방의 문을 박차고 들어 가 “어떤 놈이 임자가 있는 유소저와 혼례를 올리는 거야? 이 처자는 이미 장래를 약조한 남자가 있으니 화를 입기 전에 즉시 이곳을 떠나시오.” 하며 굵은 남자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신랑은 난데없는 야밤 침입자의 손에 날이 퍼런 비수를 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멍하니 서있자, 득순이는 재차 “뭐하는 거요. 즉시 떠나란 말이오” 소리를 쳤습니다. 혼비백산한 신랑은 이 자가 분명 신부의 샛서방임에 분명하다고 믿고는 어차피 성립되지 못할 혼례이니 내 목숨이나 살자는 생각에 속옷차림으로 그 집을 뛰쳐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한편, 신방에 있던 유소저는 터무니없는 모함과 모욕을 당하며 침입자 득순이의 십자칼에 가슴을 3번이 찔려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본 채에 있던 부모들은 한밤중에 이러한 큰 소동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나서야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집터가 워낙 넓어 본채와 행랑채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워낙 사건이 번갯불(電光石火)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지요. 아침에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안은 난장판이 된 채 신랑은 온데간데 없고 신부는 가슴에 칼을 꽂고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습니다. 소저의 아버지는 내 고운 딸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통곡하고 계모도 거짓으로 슬픈 척 하며 울었습니다. 한바탕 통곡이 지나간 후 계모는 “저 불쌍한 것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었네. 어떤 몹쓸 사람이 그랬을까. 어서 저 칼이라도 빼내고 영혼이라도 달래줍시다” 하며, 칼을 빼내려고 칼의 손잡이를 잡자 갑자기 유소저의 시신이 악새(惡鳥)로 변하여 방안으로 날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 악새가 계모 앞에서 '악-악-악' 세 번 울고 나니까 갑자기 계모가 쓰러져 죽고 말았고 한참 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찾아온 두 명의 이복동생들도 ‘악 - 악 - 악' 소리에 모두 까무라쳐 죽었습니다. 이렇게 본마누라에게서 얻은 딸을 잃고 새 마누라와 그의 소생까지 잃은 바깥양반은 '세상이 나를 버렸으니 내가 더 이상 세상에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탄식하며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한 집안의 가장까지 죽고 나니 말로 이 집안은 가문이 없어지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은 형국이 되었습니다. 한편, 신혼 첫날밤 목숨박탈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그 신랑은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팔도감사에 제수되어 고향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고을의 한 외딴집에 유소저의 유모를 하였던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마침 날이 저물어 이 팔도감사가 가까운 집에 들어간다고 들어간 것이 그 유모 집에 들어가게 되어 하룻저녁 유숙하게 되었어요. 노파가 방이 단방이어서 곤란하다고 하니 그 감사는 저희 어머니 같은 분이신데 어쩌겠느냐고 반문하며 괜찮다고 하여 겨우 잘 있게 된 것입니다.그런데 일은 한밤중에 생겨났습니다. 두 양반들 모두 피곤하여 곤히 잠든 자정이 넘은 시간에 느닷없이 안방문이 덜그럭거리며 밖에서 ‘악-악-악~'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심야에 죽은 유소저의 혼령이 변하여 된 억새가 예전 유모집으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덜거덕 거리니 무슨 소리를 들은 노파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방문을 여는 순간 그 억새가 재빠르게 방안으로 날아들더니 갑자기 죽기 전의 이 소저 모습으로 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유모 할머니와 팔도감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반가워하면서 그간의 정회(情懷)를 풀며 얘기꽃을 피웠고, 이야기 말미에는 입에 떠올리기조차 직한 신혼첫날의 사건을 언급하며 그 사건의 시작에서 끝은 오로지 마음씨 악한 자신의 계모의 흉계에 의한 것임을 밝히면서 어쨌든 자신으로 인해 아무 영문도 모르는 서방님까지 피해를 입게 된 것을 미안해하였어.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샐 즈음이 가까워지니까 감사는 유소저에게 잠깐이라도 눈이나 붙이면서 함께 자자고 청했으나, 유소저는 “저는 혼례만 올렸지 아직 서방님과 합궁을 이루지 못한 처자로 남녀유별이 엄연한데 어찌 같이 자겠습니까? 저의 죽은 육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제 몸의 상처가 아물어 다시 살아나게 될 때 비로소 서방님과 함께 살겠습니다.”하며 다시 새로 변하여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팔도감사는 당시 첫날밤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치다시피 돌아와 버린터라 그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백지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유소저가 어젯밤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날 밤 나타난 샛서방과 오붓한 살림을 차려 여지껏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것으로만 여길 정도였지요. 팔도감사는 유소 저의 변신한 모습을 보고서야 당시 신부가 죽었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유소저의 변신체가 떠난 후 유모를 통하여 유소저가 죽은 후 그 집안 일문(一門)이 모두 멸망해버린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그 고왔던 자신의 신부 유소저는 양지바른 땅속에도 묻히지 못하고 아직도 그 흉물스런 방에 방치된 채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윽고 아침에 일어나 팔도감사는 그 유모할머니와 함께 자신이 처음 장가를 들었던 집을 향하여 길을 나섰는데, 유모를 대동한 것은 남녀는 유별인데 아무리 죽은 육신이지만 남자가 함부로 몸뚱이를 만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과연 그 예전의 처갓집에 가서 신방을 들여다보니 유소저는 아직도 그 고운자태로 잠잔딕끼 (잠자듯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이람. 끔찍하게도 소저의 가슴에 날카로운 칼이 깊게도 꽂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본 유모는 불쌍하고도 안타까워 곧바로 달려들어 손잡이를 잡고 힘껏 빼내려 하였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남편인 팔도감사가 잡아 빼니 겨우 빠져 나왔습니다. 우선 칼을 빼내고 옷을 새로 갈아 입히고 하여 시신의 치욕을 해소시켰으나 어떻게 살려낼 방법이 없어 팔도감사와 유모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으며 이들은 일단 각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팔도감사가 집으로 돌아와 자기 방에서 잠을 청하는데 홀연 억새가 나타나서 유소저로 변하더니 “서방님! 너무 고맙습니다. 제가 삼 년이 넘도록 가슴이 저려서 견딜 수 없었는데 이제야 서방님 나타나서 저의 막힌 가슴을 뚫어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방에 누워만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서방과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싶습니다.” 하였습니다. 팔도감사는 유소저가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답답하기 그지없어 유소저에게 “그렇다면 당신이 살아날 수 있는 특별한 비방(秘方)이라도 있단 말이오! 있다면 말씀을 해보시오? " 하니 소저는 “있고말고요. 제가 가르쳐드리는 대로만 하시면 저는 분명코 살아 날 수 있습니다. 다만, 서방님의 정성이 얼마나 진실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저는 자기를 살리려면 우리나라 절이라는 절은 다 뒤지다보면 어떤 절간 법당 뒤편에 오색구슬이 있을 것이요. 그 구슬을 구해다가 저의 온몸을 문지르면 상처가 낫고 새살이 돋아나며 종국(終局)에 가서는 생기가 돌아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팔도감사는 오색구슬을 찾아서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절이라는 절은 다 뒤지고 다녔으나 도무지 구슬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뒤져도 별무성과가 되자 팔도감사는 낙심천만하여 우리나라에 절이 한 두 개냐며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찾기라고 한때는 포기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한이 맺힌 삶이었어! 살아있는 내가 이 정도의 어려움마저도 못 참고 포기한다는 것은 지하의 부인에게 취할 도리가 절대 아니다. 내가 힘을 내서 결국에는 못찾는 한이 있더라도 찾는데까지는 찾아보겠다며 다시 절을 향하여 나섰습니다.이 절 저 절 돌아다니기를 석 달 열흘 꼭 100일째 되는 날 지리산자락의 조그마한 암자를 찾아가서 법당 뒷편을 쳐다보니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구슬이 땅위에 올려져 있지 않것소? 그야말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상을 뜬 며느리에게 3종류의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말하자면 귀신(혼백)이 벼슬을 수여받는 것이었습니다.팔도감사는 다시 죽은 신부가 있는 신방으로 찾아와 구슬을 죽은 신부의 이마 위에 얹고 하루저녁을 같이 자니 신부의 몸이 따뜻해지며 어렴풋이 맥박이 뛰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슬을 상처부위에 올려놓으니 금새 새살이 돋아오르고 구슬로 전신을 문질러대니 신부는 '아! 잠 한번 곱게 잘 잤다’하며 눈을 부스스 벼대며 살아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팔도감사는 순식간의 기적적인 일에 놀라워하면서도 너무 반가워 뜨거운 포옹을 하며 감격적인 재회의 기쁨을 맛보앗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새로운 혼인생활을 맞이한 두 사람은 백년해로하며 많은 해보. 누리며 잘 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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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생을 내쫓은 형 설화
    옛날에 어느 마을에 어머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들 형제만 살고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연명을 해나가기 위해 방도를 세웠는데, 동생은 이웃집을 다니면서 먹을 것을 동냥해오면 형은 이것을 가지고 요리를 해서 같이 먹고 빨래건 집안살림이건 큰 일은 도맡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는 동생이 밥과 돈을 얻어오니 형은 그 돈으로 고기를 사서 볶아서 먹기로 하고 고기 한 뭉텅이를 사다가 맛있게 요리하여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하도 없이 살다보니 그야말로 고기 맛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기 형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흔히 허천났다고 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고기만 순식간에 다 집어 먹어버리니, 형은 화가 단단히 나서 “이 허천 아귀병 난 놈아! 세상에 니 입만 입이냐? 형도 한 점 먹어봐야 할 것 아니냐. 이 버릇없는 녀석아” 하면서 손가락으로 눈구녁(구멍)을 피가 나도록 쑤셔버리고 나서 네깐 놈은 필요 없다며 집 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밥을 먹다가 졸지에 내쫓김을 당한 동생은 울먹울먹하며, 정처도 없이 길을 따라서 한없이 가다가 날이 저무니 그 날 저녁을 보내려고 어느 산 기슭에 지붕있는 바위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잠을 청하려는데 허연 콧수염을 기른 산신령할아버지가 30여보 전방에 나타나더니 혼자말로 “이 건너 불빛이 보이는 동네의 가운뎃집의 처녀가 곧 죽게 되었다지. 어리석은 것들 몸채 집기둥 가운데에 100년 묵은 지네만 잡아내면 되는데” 하고는, 이어서 “저 건네 불빛이 보이는 동네의 첫 번째 집 앞의 장구배미 논에는 금이 몽땅 들어있어”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산신령이 혼자 하는 말을 한마디도 흘리지 않고 쏘옥 귀에 담아 두었습니다. 아이는 무서움을 꾹 참고 하루저녁을 보낸 후 다음날 오전 거지 행색으로 그 산신령이 말하였던 집으로 찾아가 “밥 한술만 주십시오.”하여 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있는데, 안방에서 큰애기(처자)의 신음소리가 나오고 주인어른은 딸아이 병환이 깊어 어떡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예전에 제가 어떤 어른에게서 비방을 하나 들었던 바,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주인어른은 귀가 번쩍 트여 나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으니 시험삼아 한번 해 보아라고 적극 찬동하였습니다.그 아이는 짐짓 자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불땀이 센 숯불을 피워 오도록 하는 한편 몸체 마루기둥에 얹혀진 2개의 대들보에 각각 소나무기둥을 떠받치고 마루기 둥 밑에 숯불을 피우며 기둥의 중둥을 톱으로 자르니, 그 안에서 100년 묵은 지네가 연기에 질식되어 나오길래 그 놈을 잡아죽이니 처자의 병이 씻은 듯이 싹 나아버렸습니다. 부잣집 주인은 너무 기쁜 나머지 훌훌 뛰면서 '원 세상에 이렇게 신통한 사람이 있는가.’ 온 동네방네 자랑을 하니 그 청년의 명성이 인근에 자자하였고 그 딸은 자기의 병을 낫게 해준 사람과 혼인하고 싶다고 하여 빈 몸으로 집을 나간 동생은 부잣집 딸을 아내로 얻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그 청년과 딸을 결혼시켜 인자 제금(새살림을 차려줌. 분가의 의미)을 내주려고, 그 장인이 사위에게 “어이. 자네에게 논 한 다랑이 사서 거기를 돋우어 새집을 지어주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겠는가” 물으니, 사위는 “처갓집 바로 앞에 있는 장구배미가 지대가 높고 양지바른 곳이어서 집터로는 제격일 듯 싶습니다. 기왕에 사주신 다면 그 논을 사주십시오.” 하였습니다.사실 장구배미는 집터로는 덜 좋았지만 땅 밑에 금덩어리가 가득 묻혀있다는 산신령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 청년은 여기에 흙을 메워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가며 아무도 몰래 마당 한피짝(한 귀퉁이)을 파보니 커다란 황금덩어리가 나와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큰부자가 된 동생은 이제 자기도 먹고 살만큼 되니까 자기를 심하게 구박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형 이 어떻게 밥이라도 먹고살고 있는지 적이 궁금하여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서 형이 살고있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형을 금방 알아보았으나 형은 많은 세월이 흐른데다 마음 한구석에 밥을 먹던 동생을 몰강스럽게(몰인정하게) 내쫓았던 부끄러운 과거 일이 떠올라 처음에는 잘 못 알아보았고 그 다음에는 짐짓 모른 체 했습니다.“나는 부모형제도 없고 홀홀단신 홀로 남아 늦으막에 아내하나 얻어 그작 저작 (그럭저럭) 살고 있소. 나는 당신과 같은 동생을 둔 적이 없소.” 하며 처음에는 형이 정색을 하고는 잡아떼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형님! 그러시면 쓴다요. 저는 분명히 형님과 같이 밥을 먹다. 쫓겨난 그 동생입니다. 과거 일은 과거 일이고 소중한 핏줄의 정을 느끼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하니까 그제서야 형은 [시치미를 떼며] “아! 그렇지. 이제야 생각이 나네. 내가 동생도 몰라봐서 미안하네. 그래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하며 아는 척 하였습니다.그러고 나서 두 형제는 술상을 앞에 놓고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회포를 푼 거지. 형은 동생이 산신령의 예언으로 발복하여 부자가 된 사실을 알고 자기도 땅만 파먹고(농사만 짓고) 어렵게 사는 처지에서 단번에 신세 한번 고쳐보겠다는 염원으로 동생이 산신령을 뵈었다는 그 바위 밑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이제나저제나 하며 큰 복을 내려줄 산신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산신령은 커녕 집채 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형을 덜컹 물고 가버린 거야. 착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리고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은 다 하늘에서 천벌을 내린다는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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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씨 좋은 두 동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이야기인데, 아들 성제(형제, 두 명을 지칭)를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들을 키워내어 출가시켜 큰아들은 자기 집에 같이 살고 작은아들은 큰집 옆의 오두막집으로 제금(딴살림)을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아무래도 부모제사를 받들어야 하고 가문을 이어가야 하니까 살림을 많이 떼어줘서 생활이 어렵지 않았지만 작은 아들은 원래 부모유산 자체가 적은 데다 지손(支保) 이라 서마지기짜리 산골착(골짜기) 천수답 한 다랭이 (배미) 달랑 떼어주어 항시 살림을 못 펴고 매 끼니마다 밥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곤란하여 항시 어머니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느 해 가을이었는데 작은 며느리는 자기 집 마당이 좁아 큰집 마당에 수확한 나락(벼)을 말리게 되었습니다. 큰집 마당에 펼쳐진 덕석의 한 부분에 자기 집의 나락 다섯 말을 널어놓고 시어머니께 가끔씩 저어서 말려 주시라고 부탁하고는 들에 일하러 나갔습니다. 낮 동안 시어머니가 벼를 말리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작은 아들네가 안쓰러워 큰 아들네 나락을 슬쩍 두 소쿠리나 퍼서 작은 아들네 쪽에다 붓고는 당그래(고무래)로 휘저어서 테가 나지 않도록 해놓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작은 며느리가 와서 나락을 담으니 닷 말이 넘게 되자 며느리는 “내가 분명 닷 말만 가지고 왔는데 이상하다. 나락이 마르면 조금이라도 줄어 드는 것이 이치인데”하면서 남는 나락을 큰집 나락에다 합쳐 놓았습니다. 이튿날에도 똑같이 닷 말을 널어 이날도 시어머니가 큰 아들의 나락을 작은 아들네에게 옮겨 붓고 있는데, 마침 며느리가 시어머니 점심을 차려드리기 위해 대문 앞에 들어서다 이 광경을 목격해버렸어요. [조사자: 참 황당할뻔 했네요. 제보자: 근디(그런데)이 큰며느리도 소자(효자)여. 아무리 고부간이라지만 며느리가 이 사실을 알면 곤란할 것 아니것어. 그래서 며느리는 대문간에 들어서려다가 다시 물러서서 한참 동안 밖에서 기다리다가 모른 체 하고 집에 들어왔어요] 석양이 되자 큰며느리는 작은 동서가 어떻게 나오는가 보자고 속구망(속마음)만 먹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면서 동서의 행동을 언뜻 살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동서는 꼭 자기가 가져온 만큼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손도 대지 않으니까, 이에 큰며느리는 적지 않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원 세상에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뜻밖의 재물에 욕심이 없을 턱이 없으련만, 너무 올곧은 사람이야” 하며 일만 죽어라 해도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먹는 작은 서방님네를 위해 내가 뭐라도 도움을 줘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작은 동서를 살짝 불러 “자네! 내일 저녁에 말이야 막걸리 한되하고 자네가 잘 만드는 반찬 한 가지만 해 가지고 우리집으로 오소. 자네 시숙이 워낙 술을 좋아하니 제수씨가 술 한잔 대접한다면 크게 기뻐할 것일세.” 하니 작은 동서는 어떤 영문인지도 모르고 시킨대로만 하였습니다. 드디어 다음 날 저녁 작은 동서는 큰집에 가서 “큰서방님! 제가 변변치 못하여 진즉 술 한잔 대접했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텁텁한 막걸리지만 한잔 따라 올리겠습니다.”하고 권하니시숙은 “ 별말씀을 다하시오. 네가 동생네 형편을 뻔히 다 아는데 어쩌겠소. 아무튼 참 귀한 술이니 잘 먹겠소” 하며 연거푸 잔을 비우더니 술기운이 많이 올라왔고, 이 기회만을 노리던 큰동서는 갑자기 장롱 속에서 논문서를 꺼내들고 “여보! 우리는 이제 먹고 살만하게 되었으니, 저 아래 저수지 밑의 새암배미 논을 동서네 줍시다. 당신 제수씨 징허게 짠허요(불쌍하요). 없는 집에 시집와서 한번 살아 볼라고 하는 마음이 가상치 않허요” 하면서 그 논을 동서 집에 이전해 주자고 하였습니다. 이때 사실 큰아들은 술에 크게 취하여 마누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뭐라고 뭐라고 하니까 도장을 찔러 줘 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큰며느리는 남편에게 어제저녁 당신이 동생에게 논을 주었다며 그 논문서를 보여주니, 내가 언제 그랬냐면서도 이왕 일이 이렇게 되버린 이상 그리 하자고 하여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동생 집에 논을 주게되었습니다. 동생집도 새암배미 논이 살림밑천이 되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 결과 살림이 펴지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형제가 위아래 집에서 의좋게 살면서 어머니를 떠받들고 두 사람이 백 살에 이르도록 장수를 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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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가 못 간 두 형제 설화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아주 가난하고 고생만 하는 착한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착한 동생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여쁜 처녀가 나와서 '나무하고 계셔요?' 하면서 처녀가 먼저 상냥스럽게 말을 건네니, 나무를 하고 있는 동생도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이 산 속에서 이렇게 어여쁜 처녀가 나타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 못난 자기한테 말을 걸어주니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그 자리에서 서로 이런저런 말을 하니깐 그 말을 들은 처녀가 그럼 나하고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청하니,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청년은 당황하여 아니 이 무식하고가난한 나하고 결혼할 수는 없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 처녀는 끝까지 결혼을 해 달라고 졸라 이제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고 해서 그 처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부모님께 예의를 갖추고 그 어여쁜 처녀하고 결혼을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그란데 이 집의 형도 장가를 가지 못한 상태라 그 어여쁜 처녀를 보자 형도 그 처녀를 탐욕을 내었습니다. 이렇게 형과 동생이 처녀 한 명하고 결혼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그 어여쁜 처녀가 보다 못해 그럼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결정을 내릴 테니 산으로 같이 가자고 하여 동생, 형, 처녀 셋이서 산으로 올라갔어요. 세 명이 산에 당도하여 잠시 서있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어여쁜 처녀는 온 데 간 데 없어져 버리고, 방울 새 한 마리만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동생도 형도 장가를 서로 못 가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가 잘했느니 니가 잘 했느니 만날죽도 밥도 안되게 싸우기만 하다가 늙어죽도록 장가를 못 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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