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고려장(高驪葬)이 없어진 까닭

옛날에는 먹을 것이 귀한데다 식구 수마저도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노인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거동을 제대로 못하고 병치레를 하게 되면 산에 내다버리는 흔히 고름장으로 불린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도리로서 자기의 부모를 내다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주 오래 전에는 드물지 않게 행해진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지요. 말하자면 자손들을 위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이 희생되어주는 인륜도덕에는 어긋나지만 불가피한 측면도 있는 전래의 풍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느 고을에 최생(崔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늙고 거동이 불편한 자신의 어머니를 다른 사람들처럼 동구 밖 한적한 곳에 땅을 파서 고려장을 시켜야 될 것 같았으나 차마 자신은 낳아준 노모를 매몰차게 집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습니다. 다른 방책으로 자기 집 마루의 판자를 뜯어내고 그 아래를 깊이 파서 흙방을 만들어서는 그 안에 노모를 모셔두고 수시로 먹을 것을 넣어드리고 수발을 하며 문안을 올렸지요. 다만, 마을사람들이 노모의 소재를 물으면 의아하게 여길까 보아서 관가에는 자신의 노모를 고려장 시켰다고 신고를 해놓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라에서 전국에 방()을 붙여 놓았는데, 매우 미세한 크기의 구슬을 실을 꿰어 목걸이를 완성해 내는 사람이 있으면 10만냥에 이르는 엄청나게 큰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이 방을 읽고 나서 엄청난 상금액수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군침을 삼켜대었으나, 한편으로는 굵은 바늘구멍크기도 안 되는 작은 구멍인데다 구슬 안의 구멍이 직선이 아니라 세 번 이상 돌아나가는 소용돌이 형태여서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최생도 이 방을 보고 자기가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내면 10만냥이라는 거금을 탈 수 있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하루아침에 털어 버릴 수 있는 것과 동시에 가난이라는 죄 아닌 죄 때문에 하고 있는 고려장이라는 몹쓸 짓도 그만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몇날며칠을 이 궁리 저 궁리 다 해보아도 이렇다 할 뾰족한 방법이 도무지 나오지 아니 하였는데, 불현 듯 세상살이를 많이 하셨고 바느질일에 능숙한 자신의 노모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아들은 즉시 노모에게 달려가 어머니! 이만저만해서 구불구불한 구멍이 뚫린 구슬을 꿰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것 같은데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노모는 한참을 궁리하다가 아가야! 네가 우리 집안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니 그 성의가 가상하구나. 내 생각에는 구슬의 양쪽 구멍중의 한 쪽 구멍중의 한 쪽 구멍주위에 꿀을 발라놓고는 몸집이 작은 개미 한 마리를 잡아 그 뒷다리에 실을 묶어서 꿀을 바르지 않은 구멍에다 집어넣으면 이 개미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반대편 구멍 쪽으로 기어갈 것이 아니야. 러면 자연히 힘들이지 않고 구슬을 아주 가는 실로 꿸 수가 있을 것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노모의 기발한 생각에 무릎을 탁 치며 과연 우리 어머니십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척척 알아내십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비장의 구슬 꿰는 방법을 알아낸 아들은 한양의 조정에까지 나아가 자신이 완벽하게 구슬을 꿰어낼 수 있다며 몇월 며칠까지 완성해 오겠다고 구슬재료를 받아가지고서 돌아왔습니다. 과연 노모의 말대로 시행해보니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처럼 술술 작업이 진행되어 약조한 날짜에 무사히 조정에 납품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웬만큼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어려운 과업을 완수할 수 없을 터인데 이렇게 쉽사리 해내는 것에 대하여 놀라워하며 시상식을 하는 자리에서 상금수여와 함께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왕은 최생에게 친히 술을 따라주며 어떻게 구슬을 꿸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최생은 거짓으로 고려장을 시켜놓았던 자신의 모친이 구슬을 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이렇게 쉽게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며, 남들에게 말로만 고려장을 하였다고 했지 실은 자신의 집 마루 밑에 모셔두고 부양해 왔다고 실토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두 번이나 놀랐는데, 우선은 늙은 노인이라면 먹을 것이나 축낼 뿐이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쯤으로 지금까지 생각해 왔으나 그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노인들의 오랜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혜를 후세들이 훌륭히 계승시키면 보이지 않는 좋은 재산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아들의 지극한 효성이었는데, 고려장이 당시에는 별로 흠이 될 것이 없는 일반적인 풍습이었지만, 아들은 인간적인 윤리상 차마 자기의 모친을 내다버릴 수 없어서 당시 시속(時俗)을 따르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자신의 도리를 다한 것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국왕은 마치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백 년 이상 지속되어온 인륜강상(人倫綱常)에 어긋나는 불합리한 제도를 즉시 폐지하도록 명하여 이때부터 고려장(高驪葬)이라는 악습이 사라지면서 노인을 공경하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면모가 살아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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