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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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견훤(甄萱)의 전설
    광주, 전남의 대표적인 인물전설의 하나이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탄생설화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광주 북쪽 마을에 순실이라는 예쁘고 얌전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방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면서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정을 통하고는 하였다. 이를 눈치챈 순실의 부모는 명주실을 꿴 바늘은 그 남자의 옷깃에 꽂아놓게 하고, 그 이튿날 이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담 밑 구멍에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허리에 바늘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그 뒤, 순실은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견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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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각산의 유래
    옛적에 무등산의 기맥이 흘러나온 삼각산에는 적돌골(積石谷)이라는 곳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서 키우는 소가 뿔이 3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절의 스님이 시주를 많이 얻어 가지고 소의 등에 그 짐을 싣고 해가 저물어서야 적돌골의 절로 올라 왔으나, 이날 저녁 네 곳의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서 너무 많은 짐을 실은 소는 지쳐서 그 날 밤에 죽고 말았습니다. 소가 죽은 뒤로부터는 이 절에는 빈대들이 우글거려 도저히 이 절에서는 스님이 살 수가 없어서 그 절을 아예 없애버리고 스님은 다른 절로 옮겨가 버렸지요. 절이 폐사되고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이 산에서 뿔이 3개 달린 소가 살다가 죽었다고 하여 산 이름을 삼각산이라고 붙였다고 하였습니다.이 산의 초두(처음에 새긴 나뭇가지)나무줄기가 떨어져 몇 개의 봉우리가 생겨나고 줄기줄기 마다에 학교들도 생겨나고 북구청이 들어서고 3개의 혈맥이 힘 있게 뻗어있지요. 수곡동일대의 들판이 와우(臥牛)형국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 소재(牛峙:우치)라는 자그마한 고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치동이라는 지명도 그 소재에서 나온 것인데 삼각산은 그 와우의 뿔입니다. 그리고 삼각산의 기맥(氣脈)이 북동쪽으로 이어져 송강정(松江亭)에서 면앙정(俛仰亭)을 걸쳐 담양 아홉바우(九巖)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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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바우 전설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주서방에서 담양방면으로 나가는 간선도로변에 말바우라는 잠그마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 바위가 말하자면 말바위였는데, 말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를 말바위라고 부르며 한 20여 년 전부터 생겨난 이곳의 재래시장도 말바우시장이라고 불려지고 있지요. 옛날 임진왜란 때에 만고충신(萬古忠臣)이라고 떠받들어지는 김덕령이 아주 젊은 나이일 때 장차 큰일을 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할 때의 일입니다.김덕령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천마라고 할 수 있는 용마(龍馬)를 타고 다니며 무등산일대에서 매일같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였지요. 이 말의 걸음이 얼마나 빠르든지 나는 화살에는 약간 미치지 못하였지만 거의 버금갈 정도였으니까요.덕령은 이 용마를 너댓 해 동안 훈련을 시켜 가직 화살과 같은 속도로 만들고 종국에 가서는 화살보다 빠르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어떤 일에 도통하려면 10년 공부라고 했는데 속성과로 5년 만에 거의 생각했던 수준에 올라온 거지요. 그래가지고 5년째 되는 해의 봄에 드디어 날짜를 잡게 되었습니다. 덕령은 시험을 하기 전에 미리 말을 몰고 다니면서 출발할 곳과 도착할 곳을 말에게 일러주고는 이렇게 다짐을 하는 겁니다.“야! 용마야. 오늘 너는 나는 화살과 너의 달음질을 겨루게 되었다. 만일 네가 이기면 너는 나의 애마(愛馬)로 인정받아 평생을 나와 함께 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내려치고 말 것이다.”용마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자신은 있었지만 워낙 아슬아슬한 시합인데다 조그마한 돌부리에라도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이 끝장인 것이지요. 그렇게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는데도 가혹한 시험이 다가오니 용마는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겁니다. 드디어 결전이 시간이 다가오니, 덕령은 말 위에서 화살을 꺼내어 활시위에 끼우고는 내가 화살을 발사하면 동시에 출발하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탁”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나가자 용마도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발이 거의 땅에 닫지 않고 붕 날으듯이 하여 순식간에 도착하였는데, 말 위에서 덕령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려도 도무지 화살의 기척이 없는 것이었습니다.덕령은 “말 위에서 분명히 용마가 더 빨리 왔을 텐데, 하나부터 열까지 셀 동안에도 화살이 안나타나면 화실이 이미 도착한 것이겠지. 하나- 두울- 셋 ------열. 그렇다치면 화살은 이미 숲더미에 박혔을 거야. 에이! 미련한 용마라고 너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큰소리를 내면서 장검을 하늘높이 쳐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용마의 목을 힘껏 내려치니 목이 댕강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제서야 날아온 화살이 머리에 턱 꽂히는 것이었습니다.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당한 덕령은 그 충직하고 날랜 용마를 잃어버린 슬픔에 땅을 치고 통곡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요. 용마를 잃은 덕령은 그 후로 그렇게 좋은 말은 구할 수 없었고 전쟁을 당해서도 장수였지만 평범한 말을 타고 다니면서 싸움터에 나가게 되니 자연히 많은 전공은 세우기가 어려워지고 그러다보니 따르는 군사가 적어지고 시기모함하는 사람이 많아져 충절(忠節)의 마음은 강하였지만 원대한 뜻을 제대로 한번 펴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것이었습니다.말바위는 김덕령장군이 말을 시험할 때 말이 도착한 장소로 말이 힘껏 바위 위로 발굽을 내디어서 바위가 발굽모양으로 움푹 패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도로를 확장하고 도시개발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말바위가 있던 그 자그마한 바위산을 허물어버려 지금은 아쉽게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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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뻐꾸기 우는 소리의 유래
    뻐꾸기는 여름에 날아왔다가 겨울이 닥치기 전에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는 여름 철새인데, 그 명칭도 우는 소리를 본 떠서 포곡이(布穀), 포곡새(布穀鳥), 뻐꾹새, 법국새, 쑥꾹새, 꾸국새 등 매우 다양하게 불리고 있습니다.뻐꾹새 울음소리에 대한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데, 아주 먼 옛날 남촌(南村)이라는 마을에 떡쇠라는 스물다섯 살의 가난한 총각이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회갑을 넘기고 일흔에 가까웠으나 아직 기력이 충분하여 가끔 품삯을 받고 남의 집 일을 하러 다닐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래나 저래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하루라도 빨리 짝을 구해줘서 어떻게 여우살이(혼례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꾸리도록 하는 것)를 시켜볼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열 입곱에서 여덟 살 늦어도 스물 무렵이면 다 장가를 가던 시절인데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되었으니 당시로써는 노총각 대열의 선두에 들어서 버린 것입니다. 어머니는 여기저기에 매파를 들여 그 해 늦은 봄 어렵사리 건넛마을에 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스물한 살 먹은 덕순이라는 수더분한 처녀를 며느리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혼수품이라고는 이불 한 채와 그릇 한 벌이 전부였으니 흔히 하던 말로 몸만 데리고 온 것입니다. 새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신랑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고 말없이 집안 살림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며 시집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새 며느리를 들여왔다고 해서 떡쇠의 집안 형편이 별다르게 바뀐 것은 없었고 어느덧 몇 달이 흘러 어김없이 음력설이 닥쳐왔습니다. 쌀 한 톨이 아쉬운 처지였지만 그래도 선영의 조상께 떡국 한 그릇이라도 올려야 하였기에 절구통에 한 됫박의 쌀을 가루로 빻아 솥에 쪄서 가래떡을 만들어 두었다가 그 이튿날이 되어 적당히 굳어진 다음 떡국 알맹이를 썰어놓았습니다.드디어 정월 초하루 아침이 다가와 며느리는 귀한 달걀까지 풀어 넣고 정성껏 떡국을 끓인 후 얼른 식히기 위해 솥뚜껑을 열어놓았었습니다. 그리고는 툇마루로 가서 이것저것 묵은 나물 반찬을 한참이나 챙기고 나서 ‘지금쯤 적당히 식었겠지’하며 부엌으로 돌아와 보니 ‘아뿔싸! 이게 웬일이람’ 솥 안에 떡국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누렁이 개가 제대로 누룽밥 한 번 먹지 못하고 맨날 배를 곯다시피 하고 아무 때고 동네골목에 버려진 뼈다귀 도막 하나 찾으려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돌아다니기 일쑤였는데 이렇게 항상 허기를 면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푸짐한 떡국을 본 누렁이는 ‘이거 왠 떡이냐’는 듯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뜨거운 것도 잊은 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이 핥아 먹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한편, 방안에서 차례를 지낼 준비를 하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떡국을 가지고 들어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부엌 가마솥 앞에 며느리가 우두커니 서 있고 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여려 쉽게 자기의 속내를 잘 내색하지 못하였던 며느리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개가 먹었다고 하면 가엾은 개가 실컷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드는 데다, 어쩌면 개가 먹었다고 말해도 매우 완고한 시어머니는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생각에 함구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핏기 서린 눈으로 며느리에게 “이년! 니가 떡국 먹었지. 선영봉사할 떡국을 다 먹어버리고 어디 우리 가문을 망조들일 일 있느냐. 어서 바른대로 말해 봐라” 큰소리를 치며 다그쳤습니다.머리채를 끌어 잡고 빨랫방망이로 며느리의 온몸을 사정없이 내려쳐 심한 매를 이기지 못한 며느리는 가엾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엄한 누명을 쓰고 죽은 며느리는 뻐꾹새로 환생하여 이승에서 풀지 못한 가슴 깊이 맺힌 원한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달라는 뜻에서 “떡국 떡국 개개 개개개, 떡국 떡국 개개 개개개” 하며 절절하게 운다고 하였습니다. 뻐꾸기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꼭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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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받은 동생 설화
    옛날에 어떤 마음에 아들 둘을 가진 집이 있었는데, 이 집은 묘하게도 작은아들이 부모를 부양했습니다. 전부터 큰 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것이 법도였지만, 이 집은 그러지를 못하였습니다. 큰 아들이 마음이 못돼먹어 자기 부모들이 밥 먹는 것까지 아까워 안 모시려고 하였지요. 처음에는 모시려고 하여 부모재산은 몽땅 독차지하고는 막판에는 동생한테 떠넘겨 버렸지요. 천성이 착하고 모질지 못한 동생은 형에게 한마디 항의조차도 못한 채 졸지에 부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부모 모시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내외 먹을 것도 없는 판국에 부모님께 드실 것을 넉넉히 드리지 못한 것이 항상 죄송스러워했습니다.동생은 적은 땅의 농사를 부쳐 먹으며 농한기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자기 집 땔감을 하고 남는 것은 팔아서 가용에 충당하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날 음력설 대명절을 앞두고 산에 나무하러 가서 돈이 들어갈 곳은 많아도 돈 나올 구멍은 없고 해서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고자 큰소리로 “대명절은 닥쳐오는데 내 부모를 어찌 해야 할까.” 하고 외쳤보았던 겁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남생이가 나타나 “대명절은 닥쳐오는데 내 부모를 어찌 해야 할까.”를 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영물인 남생이를 잡아다가 시장에다 팔아서 큰돈을 벌 수 있었고 명절도 무사히 쇨 수가 있었지요.동생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형이라는 놈은 동생을 찾아와서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자기도 다음날 지게를 메고 산으로 가서 “내 부모를 모시려는데 돈이 없구나.” 외치니 남생이가 “내 부모를 모시려는데 돈이 없구나.” 따라 하였지요. 형도 그 남생이를 잡아다가 시장에 팔러 갔는데 사려는 사람이 어디 진짜 소리를 잘하는가? 한번 보자며 ‘나는 남-생이다.’, ‘나는 남-생이다.’ 이렇게 몇 번을 외쳐도 남생이는 꿀먹은 벙어리였습니다. 그러자 손님은 ‘벙어리 남생이구만’하며 안 사고 떠나버리자, 화가 잔뜩 난 형은 남생이를 그 자리에서 막대기로 때려서 죽이고 말았습니다.그러고 나서 형은 동생에게 찾아와 “네 이놈. 너 거짓말 한 것 아니야? 세상에 남생이라고 말 한자리를 못해서 시장바닥에 내팽개쳐 죽이고 와버렸다.”고 쏘아붙이고 돌아갔습니다. 동생은 가엾게 죽은 남생이를 주워다가 자기 집 부엌 뒤에 고이 묻어주었더니, 거기에서 굵은 죽순이 올라와 왕대가 되면서 대나무 가지가지에 금은보화가 수없이 매달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또 이 소식을 들은 형은 동생을 찾아와 나도 부자로 좀 살아보자고 졸라대니, 부엌 뒤의 남생이 유해를 파다가 형님 집 뒤뜰에 묻으면 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남생이 유해를 묻은 형은 죽순이 돋아 대나무로 자라나면 나도 큰 부자가 될 거라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가느다란 죽순이 돋다가 갑자기 말라서 죽으면서 뱀과 구렁이가 구덩이에서 쏟아져 나와 온 집안에 가득 차고 놀란 형은 허겁지겁 집 밖으로 달아나려다가 날쌔게 뒤쫓아 온 독사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착한 맘을 가지면 복을 받고 나쁜 맘을 가지면 벌을 받는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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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렁이탕과 효심 설화
    옛날에 광주 북쪽에 있는 마을에 바우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는데 근데 그에게는 눈이 멀어버린 봉사 어머니와 매우 착한 아내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스무 살을 갓 넘겨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외아들 양육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는데 대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 밭일이며 바느질하기, 장 담그기, 잔칫집 이바지음식 만들기 등 할 수 있는 갖은 품팔이를 다하여 겨우 연명해 나갔었는데 너무 젊어서부터 힘든 일을 하여서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들면서 시름시름 온 삭신이 아파오더니 그만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음식섭취는 보잘 것 없는데 맨 날 하는 일은 고되다보니 영양부족이었던 것이었습니다.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한 아들은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모친을 등에 업고 여기저기 신통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녀 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바우네 집에서는 당장에 힘들게 되니 이웃사람들이 서둘러 바우의 혼인을 치르게 되었고 평소 어머니의 심덕이 좋은 탓이었는지 이웃마을에 사는 마음씨 좋고 효성이 지극한 처자가 며느리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따뜻한 밥을 지어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수시로 팔다리를 주물러서 몸이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더 말할 수 없는 효부였습니다. 새로 장가든 바우는 몇 달 간의 신혼을 보내고 나서는 마냥 이러고 살 수만 없다는 결심을 하였고 꼭 한번 집안 살림을 번성시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리라는 각오로 멀리 행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이제 시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며느리는 어떻게 하면 앞이 보이지 않는 시어머니의 눈을 보일 수 있게 할까 하는 궁리를 다하였고 마침 어떤 사람으로부터 멀어버린 눈을 뜨게 하는 데는 토룡(土龍:지렁이)처럼 영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날부터 며느리는 자기 집 앞뒤 마당의 흙을 샅샅이 뒤져서 지렁이를 잡아다 지렁이탕을 끓여서 드렸습니다. 자기 집 마당의 지렁이를 모조리 잡고 나서는 며느리는 부끄러움도 잊고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지렁이를 잡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지렁이는 기름지고 부식된 땅에서 많이 산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몇 달간 정성을 다하여 지렁이탕을 끓여드리니 시어머니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후루룩거리며 드시고는 “도대체 이것이 뭔디 이렇게 항시 먹어도 맛이 좋은거냐!”는 말을 하셨고, 드디어 석 달이 넘는 오랜 행상을 마친 아들이 어느 날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서 문안을 드리기 위해 방안을 들어가 보니 어머니가 상위에 놓인 뚝배기에서 무엇을 부지런히 드시고 계셨습니다. 아들은 궁금증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렁이를 끓인 탕을 드시는 것이었습니다.아들이 너무 황당하여“어머니! 원 세상에 징그럽게 무슨 지렁이를 다 잡수세요.” 하고 소리를 치니난데없는 아들의 소리에 울컥 비위가 상한 어머니는 “뭣이라고. 내가 지금 지렁이를 먹고 있다고?” 하며 되물었습니다.모자간의 대화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며느리가 걱정이 되어 방에 들어왔는데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 말이 진짜냐? 어디 한번 볼까?” 하며 자신이 눈먼 사실도 잊은 채 감겨진 눈꺼풀에 힘을 주자 순간적으로 눈이 번쩍 떠지게 되었으나, 이와 동시적으로 며느리가 “앗” 하는 외마디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며느리의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바우는 어쩔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어머니가 눈뜬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마음씨 착한 아내의 눈이 멀어버린 것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눈앞이 캄캄한 상황이었는데 정신을 가다듬은 바우는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따져보아 이렇게 된 원인을 캐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방밖으로 아내를 데리고 나온 바우는 아내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조곤조곤 물어 보았습니다.그러자 아내는 시어머니의 눈을 낫게 하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힘들게 지렁이를 잡아다가 탕을 끓여 주었다고 하니 고생이 많았다고 하며 칭찬을 해주었는데 그러면서 아내에게 그 지렁이 탕의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아내는 삐죽거리며 얼른 답변을 못하였습니다. 사실 미끈미끈한 지렁이를 손으로 잡는 것까지는 꾹 참고 하였지만 징그럽고 구역질이 나서 선뜻 맛도 보지 않고 시어머니께는 좋은 약이라고만 둘러대고 드시게만 한 것이었습니다. 신랑 바우는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면서“그야 그렇지. 탕을 끓여드리는 효심이 있기는 하였으나 효성이 꽉 차지는 못한거로군. 자네가 이왕 시부모 봉양을 하는 김에 조금만 더 노력을 했다면 좋을 것인데. 그렇다고 너무 그리 괘념은 마시오.”하며 원인파악과 동시에 아내를 다독여 주었습니다.바우는 다시 지렁이를 잡아다가 아내에게 끓이는 방법을 배워서 끓인 다음 한 그릇을 퍼내어 마음속으로“제 아내의 부족한 효성을 용서하십시오. 제가 대신 속죄를 드립니다.”라고 일용수를 하고서는 용기를 내어 한 숟갈을 자기 입안에 떠 넣는 순간 옆에 있던 아내의 감긴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이리하여 세 식구는 세상의 있는 복 없는 복을 누리며 잘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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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산 설화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삼신산을 찾아 삼신 산신을 불러 초청연을 베풀려고 했으나 무등산만이 이를 거절해 등급이 없는 무등산이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다른 전설로는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백 대에 이르도록 왕업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혁명을 일으켜 죽인 고려 말 명신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기도하려 이곳에 들렀다는 얘기가 있기도 했습니다.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조에 무등산 일대에는 360암자가 있었고 이 산에서 백팔나한이 살았으며 부처가 설법을 다니던 사자좌가 있어 인근 모든 산신들이 이곳에 공양하기 위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명산이라 이성계도 이 산에 와서 3일 기도를 더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잠이든 태조대왕의 꿈에 그가 죽인 정몽주 등 고려조의 명신들이 칼을 들고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고 하였는데 이런 악몽에 시달리던 태조는 얼마쯤 뒤에 입석대를 향해 걷는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서기가 감도는 서석대에 이르니 한 선인이 그를 맞으며, “그 동안 대왕께서 3일 기도중인 것을 알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법회가 열리고 있던 중이라 찾아뵙지 못하고 있던 차에 석가부처께서 대왕의 악몽을 아시고 즉시 저를 보내 정몽주 등 고려 충신들을 질책하시고 대왕을 맞도록 한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태조가 석가 앞에 이르러 여러 치정의 도를 배우고 석가가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니 사람인자 형국을 한 산이 우뚝 서 있는데 석가는 이 산 한 쪽의 붓 바위를 가리키며 석가는“저 붓 바위가 대왕의 취적을 하늘에 기록 할 것이다.” 라 말했다고 했습니다.태조는 잠에서 깨어 괴이한 일도 다 있다고 곁에 있던 대랑에 그 꿈속의 산을 찾도록 일렀더니 무등산에서 서북쪽으로 담양 수북면에 삼인 산이 있었습니다. 태조는 이 산을 찾아가 다시 제를 올리고 산 이름을 몽성산이라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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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金德齡)의 태몽 설화
    충효리 마을에는 광산김씨들이 자자 일촌을 이루며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벼슬이 찬성에 오른 이도, 목사를 지낸 이도 모두 이 부락에 자랐는데 이야기는 1566년 3월 어느 봄날 이었습니다. 이 마을 김붕선씨 집에서 부인 남평 반씨가 실꾸리를 감으면서 길쌈하는 아낙네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골짜기를 스쳐오는 맑은 바람에 취해 스스로 잠이 들었는데 꿈에 큰 범이 느닷없이 반씨의 품속에 들어와 안겼습니다.부인은 조금도 두려움 없는 얼굴로 범의 등을 쓰담드어 주었고 범은 물지도 않고 고양이처럼 다소곳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생각해 보며“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라고 했습니다.그때 마침 중문이 열리면서 남편이 돌아왔어요. 밖에서는 남편의 헛기침 소리가 두어 번 뜨락을 울리더니 여느 때 같으면 사랑으로 들어가야 할 남편이 안방문을 열었습니다.“왠 일이셔요, 오늘은?”“부인이야 말로 왜 그렇게 놀라요?”“실은 조금 전에 호랑이 꿈을 꾸었어요.”하고 꿈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허, 이 집안에 장군 나겠구먼!” 라고 했습니다.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자, 반씨 부인은 하품을 쏟게 되고 몸이 피로해진데다가 입맛조차 시원치 않았습니다. 몇 달 전의 호랑이 꿈이 태몽이었음을 깨달은 반씨 부인은 몸을 정결히 하고 음식도 가리는 한편 예의범절에 마음을 쏟았습니다.1576년 12월 29일 반씨 부인은 드디어 아이를 낳았는데 이때 닭이 회를 치면서 새벽을 알렸고 산파가 더운 물로 아이를 씻어 산모 곁에 뉘어 놓이면서 사내아이라고 귀뜸 해 주었습니다. 이윽고 전갈을 하기 위해 하인들이 횃불을 밝혀 들었고 그들은 사랑체로 가다가 호랑이 두 마리가 뜨락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괴이한 것은 이들 두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본 붕선 어른은“산신령이 내 집에 살고 있는 것을 아시고 무사한지 지켜보도록 호랑이를 보내신게 틀림없소.”하고 말하였고 두 호랑이는 개, 돼지 따위 가축 한 마리 해치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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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째 아들이 효자 설화
    오랜 옛적에 광주북쪽 고을에 눈이 보이지 않고 걸음을 걸을 수 없는 말하자면 당달봉사에다 앉은뱅이인 늙은 어머니와 한의사인 장남 그리고 매우 효성이 지극한 차남 이렇게 세 식구가 살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나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너무 고초(고생)를 많이 겪은 탓에 늘그막에 들어 갑자기 몸이 망가져 봉사에다 앉은뱅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특히, 장남은 집안을 이끌어갈 대들보로 여겨 없는 살림이지만 공부를 많이 시켜 한의사까지 만들었지만 차남은 장남에게 치중하다보니 별로 공부를 못시켰으나 불평 한마디 없었고 효성은 항상 변함이 없었지요. 하루는 식구들이 조반을 마치고 나서 그 어머니가 20리 넘게 떨어진 마을에서 성대한 굿판이 벌어지니까 오늘은 그곳에 놀러가고 싶다고 하니, 아니나 다를까 큰아들은 한의사 일을 보아야 하니깐 시간이 없다며 꽁무니를 빼자(뒤로 물러서자) 작은 아들이 나서면서 '어머니께서 가시고 싶다하는 데는 어느 곳이든 모시고 가야지요.'하며 어머니를 등에 업고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오리(五里)를 지나자 등에 업힌 늙은 어머니가 염치도 없이(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닭고기가 먹고 싶으니 닭을 구해다 삶아 달라고 했습니다.그러나 효자는 수중에 돈 한 푼이 없는 데다 그릇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닭을 구해다 요리해서 드려야할지 무척 난감하고 부담스러워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이때 지나는 길목의 어느 마을 어귀에 다다르는 순간, 8마리의 살이 통통하고 오른 닭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이들 일행 앞으로 지나가다 몸집이 크고 튼실한 한 마리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죽은 것이었지요. 닭을 어떻게 구할까 고심하던 차남은 닭 주인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우선 급한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서 차후를 도모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우선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차남은 어머니를 나무그늘에 앉아 쉬시도록 해놓은 다음 얼른 그 닭을 주어들고 인근의 남의 집으로 들어가 칼과 냄비를 빌려가지고 나와서 산 밑에서 닭을 잡아 푹 삶아 어머니께 드렸습니다.닭고기를 맛있게 들고난 후 다시 목적지로 향하는데 한 오리(五里)쯤 지나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목이 마르니 물을 먹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물이 있는 마을까지 가자면 아직 많은 거리를 가야하고 날씨마저 무더워서 오랫동안 참을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작은 아들은 어머니를 나무그늘 밑에 내려놓고 사방으로 물을 찾아 나섰는데, 한참을 해맨 후에 산중턱 움푹한 곳에서 미룡(사람의 시신을 파먹고 산다는 벌레의 일종) 3마리가 떠있는 인대골 안에 담긴 물을 발견하고 깨끗한 물이 없으니 이것이라도 갖다 드릴 수밖에 없어서 해골물을 조심스럽게 들고 와서 어머니께 드리니 이 물을 먹고 나자마자 앉은뱅이였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섰고 이어서 감겨있던 눈꺼풀이 벌어지면서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어머니는 '이거 원 세상에 무슨 조화다냐'며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은 모르면서 "다 너의 효성이 지극해서 이런 갑다"고 작은 아들을 칭찬해주었습니다. 이들 모자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동네방네 잔치하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접고, 이왕에 힘들게 나선 길이니 구경이나 맘껏 해보고 돌아가자 하여 늦으막까지 굿잔치를 보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큰 아들이 어머니와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며 완치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놀라며 물으니, 어머니는 그동안의 과정을 이차이차 하여서 저차저차 되었노라고 소상이 얘기를 해주었습니다.모친의 이야기를 다들은 한의원인 큰아들은 "어머니의 병세는 8마리가 뛰어노는 닭의 무리 중에서 갑자기 꺼꾸러져 죽은 닭은 잡숫고 나서 미룡 3마리가 떠있는 해골바가지 안의 물을 드셔야만 나을 병이라는 것을 저는 진즉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저라고 해서 이러한 약을 구해낼 뾰족한 방도가 없어서 여지껏 못 고쳐드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자신의 능력과 효성이 부족함에 대하여 크게 사죄하였습니다.그러자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다른 사람에게는 도무지 보이지 않던 약이 너의 동생의 효성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눈에 비쳐나타난 것이 아니었겠냐고 풀이하였습니다. 건강을 다시 찾게 된 어머니는 두 아들들로부터 더욱 극진한 효도를 받으면서 오래도록 장수를 누렸고 형제들도 이전보다는 끈끈한 우애로 행복을 누리며 의좋게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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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을 버린 효부 설화
    아주 오랜 옛날에 구십살이 넘은 할머니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상당히 노망기가 있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일종의 치매증상 이었는데 예전에는 못 먹고 사는 세상인데 늙으면 유난히 고기가 당겨서 세상에 자기 손자인지도 모르고 애기를 솥 안에 넣어서 삶아 놓고는 며느리에게 솥 안에 통닭 한 마리 삶아 놓았으니 건져내어 깨소금 종지를 딸려서 방안으로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고기를 삶아 놨다길래 별로 신빙성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하여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셨을까 하며 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아뿔사!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섬짓하고 적이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닙니까? 원망해봤자 죽은 자식이 살아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며느리는 자식을 잃은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마음 속으로만 삭혀내면서 눈물 속에서 죽은 자식을 고이 꺼내다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며 무지한 할머니 탓이니 너무 한탄 말고 좋은 곳으로 가도록 기원해주었습니다.그리고 나서 며느리는 슬픔도 잠시 시어머니가 얼마나 고기를 먹고 싶었으면 이랬으랴 싶어 즉시 이웃집에 가서 큼지막한 통닭 한 마리를 사다가 정성스레 고아서 갖다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속도 모르고 아까 진즉 내가 통닭을 삶아두었는데 뭘 꾸물거리며 이제야 갖다주냐며, 그렇기는 했어도 잘 고아져서 참으로 맛있게 먹기는 하였습니다. 귀염둥이 외아들을 잃은 며느리는 날이 어둑해지자 허전한 마음으로 우두커니 앉아 아들생각에 눈가에 소리 없는 눈물만 주르르 흘러내릴 뿐이었습니다.눈에 지그시 감고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상념에 사로잡혀 마음이 심란해져 있던 차에 갑자기 싸리대문이 삐그덕 열리면서 네 살 쟁이 어린 아들이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며느리는 필시 꿈을 꾸고 있는 것만으로 생각되어졌으나 분명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네 살 쟁이는 '엄마 나 왔어요. 친구들이랑 놀다보니 조금 늦었어요. 걱정하셨지요.'하며 들어왔습니다. 아이 엄마는 그제서야 꿈이 아닌 것을 알고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내려가 뜨거운 모자간의 재회를 하였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라 하늘이 감동하여 죽은 자식을 살려내어 도로 보내준 것이라고들 칭송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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