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명판관 원님의 아들

우리나라 조선시대말기에는 어치케나(어떻게나) 관리들의 수탈이 심하고 해마다 숭년(흉년)이 자주 들어 백성들이 묵고(먹고) 살기가 팍팍했다고 해요. 그래서 함경도 평안도 사람은 물론이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이렇게 아랫녘 사람들까지도 고향을 등지고 땅덩이가 엄청나게 넓어 열심히 노력만 하면 마음 편허게 살 수 있다는 만주땅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주행렬은 조선시대에서 일정시대까지 이어지지 않았어요. 전라도에서 살던 어떤 농부도 하도 부쳐먹을 땅이 없고 사릭가 팍팍혀서 이렇게 사느니 보다 차라리 만주로 가서 열심히 일을 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의욕으로 살림살이를 매둥그려서(포장해서 싸서) 생활비로 쓸 돈도 챙기고 하여 이주하려고 길을 떠났답니다.

자신은 짐을 지게에 지고 처는 머리에 이고 몇날며칠을 걸어서 압록강인근의 의주라는 고을에 도착하여 춥고 허기에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어떤 부잣집에 들었는데, 그 집이 마침 고을을 면임(面任)인가 면장인가를 하는 집이었는 갑디다. 그 집에서 따뜻한 방안에서 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래라며 수북하게 밥을 차려다주어 맛있게 먹으면서 바깥주인양반이 추운 날씨에 일가족이 무슨 이사행장이냐고 하길래 이만저만해서 만주로 들어가서 살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바깥주인 "그도 그럴만 합니다. 하지만 땅도 설고 물도 설은 타관땅에서 사는 것보담 내 집에서 우리집 일을 돌보아 주며서 살면 몇 년 안 가서 상당한 재물을 모아 다시 고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도. 내가 당신이 일한 것은 1년 단위로 새경을 쳐서주고 당신부인의 일삯도 톡톡히 쳐서 드릴 것이도. 그리고 혹시 당신의 수중에 돈을 가진 것 있으면 저에게 맡기시오. 차용증을 다 써주고만 있으면 이식(利殖) 한푼이나 붙것소?" 하는 겁니다.

그 순박한 그 농부는 듣고 보니 숙식을 해결해 주겠다 돈도 안전하게 키워주겠다하니까, 굳이 타관땅(만주)을 가지 않아도 살림기반을 쉽게 잡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약조하고 종이에 차용증서까지 작성하고 손도장까지 찍었다 이거지요. 거처를 마련한 부부는 주인 면장댁의 일을 내집 일처럼 열심히 거들었어요. 이십 마지기가 넘는 논과 밭을 풀 한포기 없이 경작하고 땔감준비 등 집안일도 각단지게(말쑥하고 짜임새 있게) 해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주인은 새경의 '새'자도 입 밖으로 내려고를 하지 않는 거여요.

이제일까 저제일까 기다리고 기다리다 한 달이 경과하자 머슴을 사는 남자가 "주인어른! 일년마다 주기로 약조한 머슴새경인 벼 열 섬은 언제 주시겠습니까? 무슨 이야기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니, 주인은 시큰둥한 어조로 " 아. 그거요. 내가 깜박 말을 미쳐 못했소. 당신의 새경은 당신이 여기올 때 맡긴돈 있지 않아요. 그 돈에다 합쳐서 이미 정월초하루부터 이자가 크고 있소. 그러니 걱정일랑은 붙들어 매어도 좋겠소. 새경은 염려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주시오" 잘라 말하는 거야.

조금은 이상한 듯도 싶었으니 이자가 확실히 크고 있다고 하니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고 또 일년동안 일을 하였는데, 주인은 이때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물어보니 그때서야 저번에 하였던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여. 설마 관직에 있는 분이 거짓으로 남을 속인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제. 그리고 또 일년 농사일을 하게 되어 삼 년을 채울 계획을 세웠는데 삼년간 새경에다 처음 올 때 맡긴돈과 이자를 합하면 고향에 돌아것 논 예닐곱 마지기는 족히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요. 힘들었지만 희망을 가지고 남의집살이를 하며 가을에 접어들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아무렇지도 않는 머슴살이하는 양반 부인의 아랫배가 약간 불러오는 듯 하며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였어. 머슴이 어떤 확실한 사실증거를 잡은 것은 아니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이미 주인(면장)과 머슴의 아내가 몰래 정을 통해왔던 것이지. 왜냐하면 면장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머슴의 아내가 자신의 부인보다 훨씬 젊고 얼굴이 곱고 해서 정분(精分)이 났던 것이지. 머슴은 자기 부인의 미심쩍은 행동을 의심하며 꼬치꼬치 캐내려 하자 펄펄 뛰면서 아니라고는 하였으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어.

머슴이 이러한 상황을 눈치챈 것을 안 주인은 본격적으로 머슴을 쫓아낼 계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어요. 그런데 머슴은 글씨를 모르는 까막눈이었는 갑디다. 처음에 들어와서 돈을 맡기는 날 차용증을 작성할 때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찔러줘야 하는디, 글씨를 몰라서 주인이 그 양반의 이름을 대신 써주고 손도장만 찍은 것이여. 면장이 이 사람은 글씨를 모르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글씨를 모른다는 것을 악용하여 원래차용증은 놔두고 새로 차용증을 몰래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반대로 면장이 이 사람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는 댓가로 이 백 냥정도 되는 돈을 주인에게 주겠다는 말로 바꾸었다 이 말이여. 생경도 이자를 쳐서 주겠다고 한 말이 모두 거짓뿌렁이었어.

더 이상 지체하면 안되겠다 싶어 면장인 주인은 머슴을 불러서는 "여보시오. 그동안 내 집에서 일해주느라 고생은 하셨소. 그러나 나도 그동안 당신내외를 먹여주고 재웢고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 우리 집 형편도 어려워지고 어 이상 같이 있기 힘들어거 그러니 열흘 이내로 모른 것을 정리하고 떠나주시오. 지난번에 맡긴 돈은 숙식비로 공제할 테니 받아갈 생각은 마시오. 숙식비가 모자라 새경도 한푼도 줄 수 가 없으니 그리 아시오" 하며 퇴거명령까지 내렸어요.

이 무식장이 머슴은 날벼락같은 얘기를 들었어도 풍채좋은 주인양반의 기세에 눌려 말 한마디 제대로 따지지 못하고 물러 나와 낙심천만하면서, 이제 돈 뺏기고 마느래 뺏기고 내가 더 이상 살아서 뭣 허것냐 싶어 인자 압록강까지 가서 나하나 풍덩 빠져죽으면 그만이지 나같이 못난 놈은 이 세상에 살 가치도 없어 하며 강물에 빠져 죽을라고 작심을 혔어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막상 물에 뛰어들라고 앉아 있는데, 마침 열대여섯 살이나 먹어 보이는 청년하나가 지나가다가 왠 신발을 벗은 남자를 보고는 자살하러 온 것임을 직감하고 얼른 다가가서 자초지종을 물은거야.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들을 청년은 이건 너무 억울한 일이거든. 부친이 고을 원님인 청년은 아버지께 이 사실을 고하고는 자신이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만한 방안을 가지고 있다며 부친께 원님의 복장만 좀 빌려주시도록 부탁하였어.

며칠 후 아들이 원님의 보강을 하고는 물통골 최아무개 면장이 머슴에게 못할일을 자행했다며 시비곡직을 가리기 위해 면장과 머슴을 불러오도록 하였어요. 가짜 원님은 이들을 대면을 시키면서 죄를 추궁하니 면장이 그 종이를 내미는 것이었어요. (여기서부터 나오는 원님은 참말로 원님이 아니라 다 가짜원님 즉 원님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계약서를 보니 법적으로는 면장에게 무슨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원님은 억울해하는 머슴살이 양반의 태도로 보아 여기에는 필시 무슨 간계나 속임수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심증이 들게 되었답니다. 머슴은 저 주인이 제 마누라와 간통까지 벌렸으니 그만한 벌을 내려주고 새경은 그만두고라도 맡긴 돈만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렸지. 원님은 '도둑은 앞으로 잡아야지 뒤로 잡을 수는 없다'는 말처럼 죄인의 죄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고 특별한 증거가 없으니 이렇다할 뾰족한 방법이 없어 고민이었어요. 며칠동안을 궁리하던 원님은 한사람이 들어갈 만한 궤짝을 준비하도록하고 송사의 관련자들인 머슴부부와 주인인 면장 세 사람을 관가로 불러들여 칸막이가 제대로 되어 서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알 수 없는 독방에 나누어 가두었다 이겁니다.

각기 개인별로 문초를 시행하고는 원님은 실제로는 면장에게만 궤짝을 짊어지고 일정한 구역을 돌아오게 하는 벌칙ㅇ르 주려하였음에도 세 사람 다 똑같은 벌칙을 준다고 거짓으로 일러놓았어요. 한 사람만 벌칙을 준다고 생각하면 사람차별 한다고 따지려들 것 아니 것어요. 원님은 면장을 불러내서 네가 제일 먼저 벌칙을 시행해야 것다며 사실은 머슴살이하는 양반을 궤짝 안에 들여넣어 놓고는 이 궤짝 안에는 머슴의 아내가 들어 있다고 거짓을 일러 준거야.

면장은 지게에 궤짝을 지고는 오리 남짓되는 길을 끙끙대며 돌아오는데, 그 중간에 궤안에 자기가 정을 통한 여인이 있는 것으로 믿고는 대뜸 "이보시오! 궤 안에서 답답하고 힘들지. 내가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무식쟁이 그놈을 내쫓아버리고 우리는 마음놓고 행복하게 살게 될거요. 조금만 참고 견뎌봅시다. 지금 내말 듣는거요. 왜 대답이 없어요" 하는 거였어. 아무 대답이 없자 " 하기는 말대꾸할 힘이나 있겠소. 조금만 참읍시다" 하며, 정해 준 길을 한바퀴 돌고 관아 앞마당에 도착하였어요.

원님은 힘들게 도느라 고생은 했다며 잠시 거기 서 있도록 하고는 나졸들을 불러 "이 궤짝 문을 따서 열도록 하여라" 명하였어요. 그런데 이게 웬 일 입니까? 궤짝안에서 그 머슴이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면장은 얼굴빛이 사색이 되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이었어. 면장은 아차 나의 실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돌아오기만 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하며 모든 것을 낙담하는 표정인 거야.

원님은 머슴더러 지게질하는 도중 저양반에 무슨 말을 안 하더냐고 물으니 머슴은 '저 자가 머슴놈을 내쫓고 둘이 멋지게 살아보자'고 한 말을 제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답하는 거여요. 이렇게 하여 원님은 면장의 흉계의 증거를 잡아서 즉시 결박하도록 하여 낱낱이 죄상을 밝혀내었고, 즉시 빌린 돈을 이자까지 쳐서 내줌과 동시에 3년동안 밀린 새경도 갚아주도록 판결하였어요. 나쁜 죄상이 밝혀진 면장을 즉시 파직시키고 장형(杖刑)을 내렸답니다.

주인남자와 정을 통한 부인은 그제서야 이실직고하며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면 개과천선하여 착한 아내가 되겠다고 빌었으나 남편은 받아주지 않고 내치게 되어 여자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머슴살이 남자는 지혜로운 가짜원님(원님의 아들)의 덕분에 빼앗길 뻔한 많은 돈과 새경을 고스란히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십여마지기의 전답을 장만하고 새로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남부럽지 않게 잘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옛말에 낮말은 낮새가 듣고 밤말은 밤새가 듣는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그 면장도 말조심을 했더라면 비록 나쁜 행동을 하였지만 상당한 돈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인데, 입이 가벼워 못했지 않아요.

예전에는 우리나라가 법이나 모든 것이 제대로 안 갖추어져 있어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무법천지나 다름없었고 많은 불쌍한 백성들은 조정이나 벼슬아치들로부터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수도 없이 당하면서도 항변 한번 똑바로 못하고 평생을 살다가 건 것이지요. 참 민초들이 살기에는 힘든 시상(세상) 이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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