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호랑이를 따돌린 남자

아주 오랜 옛날에 어느 산골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마을 주변에는 호랑이가 우글거리며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들은 틈만 나면 마을 사람들 물어가고는 하였지요. 그런데 이 호환이 이들 오누이에게까지 미칠 줄이야. 인근의 깊은 산에서 사는 한 수컷호랑이는 여지껏 짝을 삼을 암컷 호랑이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허사여서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사람이 사는 민가에서 참한 처녀를 데려다가 짝으로 삼는 것이었는데, 그 호랑이의 배필감이 바로 오누이의 누나였던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는 다치지 않게 그 처자를 조심스럽게 입에 물고는 쏜살같이 자기 집을 향하여 내달아서 도착한 곳이 바로 유명한 인왕산의 호랑이 굴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려 반쯤 넋이 나간 처자를 굴 안에 내려놓고는 이보시오? 젊은 규수! 나는 이곳에 사는 호랑이지만 무서운 호랑이가 아니오. 나도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호랑이요. 규수로서는 조금 안된 일이지마는 내가 20여세에 이르도록 아직 천생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몽달귀신으로 죽는 것만은 면해야 되겠기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데리고 오게 된 것이오. 하필이면 당신이 걸려들어 안되기는 하였지만 어쩌겠소. 모든 세상사가 운명이려니 하고 두렵고 내키지 않는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하면서 처자를 다독거렸습니다.

처자는 호랑이의 이야기를 듣고는 앞이 캄캄하고 중치(가슴)이 막혔으나 체념상태로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저로서 어쩔 도리는 없으니다만, 한 가지 부탁을 내건 것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저를 해치지 않겠다는 것과 항상 저만을 위해 살아주겠다는 약속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확답만 해주시면 저도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라고 들릴 듯 말 듯 한 가는 목소리로 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호랑이와 살림을 차린 누나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둘 사이에 남아인 범용이와 여아인 범례라는 아들과 딸을 낳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한편, 졸지에 누나를 잃어버린 남동생은 이런 고약한 호랑이가 하나밖에 없는 누이를 들쳐 업고 가버린데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호랑이를 혼내주고 자기 누나를 구해올 생각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는 호랑이굴에 쳐들어가 호랑이를 맞딱뜨리면 어떻게 물리칠까 아니면 감쪽같은 술수를 써서 따돌려버릴까 하는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하면서 누이 구출작전을 세워나갔습니다. 드디어 5년여 걸친 치밀한 작전 계획에 의해 남동생은 그 무시무시한 호랑이굴을 향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깊은 산골로 들어가 산길의 호랑이 발자국을 추적하여 몇 군데 굴을 뒤져보니, 다른 호랑이가 살고 있거나 호랑이가 지금은 살지 않는 굴이 있었고 드디어 자기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굴을 찾아내었습니다. 굴 앞에서 누나를 불러대니 누나는 너무 반가워서 맨발로 뛰어나와 동생을 얼싸안고 한동안 오누이의 깊은 정을 나누었습니다. 남동생이 도착한 때에는 마침 수컷호랑이가 사냥을 위해 굴 밖으로 출타 중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러자 누나는 얘야! 조금 있으면 너희 매형(호랑이)이 돌아 올 시간이다. 너희 매형은 성질이 고약하여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있으면 그냥 두지 않는단다. 어서 장롱 속에 들어가 꼭 꼭 숨어 있어라.”하며 남동생을 황급히 숨겼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수컷 호랑이는 코를 킁킁대면서 어 이거 무슨 냄새야? 인내(사람냄새)나네. 분명히 인내야.” 하면서 이상한 느낌을 알아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나는 인내는 무슨 인내다요? 내가 사람 아니요. 제한테서 나는 냄새겠지요.” 하며 말문을 막고 말꼬리를 다른 곳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리고는 호랑이 남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갑자기 아이고 배야! 무슨 배가 이렇게 아프다냐.”며 신음소리를 내자, 호랑이 남편이 걱정을 하면서 혹시 어제 저녁 먹은 고기 때문에 배탈난 것이 아니냐면서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고나면 괜찮아질지 모른다면서 화장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누나는 거짓으로 용변을 보는체하고 한참 후 나오면서 볼 일을 보고 나니 괜찮아졌다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는 배탈 기운으로 얼굴이 헬쓱해진 마누라를 위해 뭔가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여보? 내가 얼른 나가서 토끼 한 마리 잡아다가 고아줄까.” 물으니, 부인은 다 나았는데 뭘 그렇게까지 신경 쓸 것 있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정 그렇게 해주고 싶으시면 잡아오세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숲으로 나가 순식간에 통통한 토끼 한 마리를 잡아다 솥에다 넣고 불을 지펴 삶고 있었습니다. 치밀한 탈출계획을 세운 남동생은 이 호랑이굴에 당도했을 때 이미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호랑이굴 입구를 막을 만한 바위를 인근 산비탈에서 굴려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굴 옆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장롱 안에 숨어 있다가 누나와 매형이 배가 아프다며 소동을 벌이는 순간을 틈타 순식간에 빠져나와 굴입구를 어른한사람 빠져나올 틈만 남겨놓고 막아버렸습니다.

미리 동생은 누나에게 내가 어느 순간 감쪽같이 이 소굴을 빠져나오면 바로 뒤따라서 나오도록 일러놓아 두었습니다. 이때 누나는 굴 입구가 왜 어둑해지냐며 살펴보는 체하다가 막아둔 바위틈으로 순식간에 빠져나와 저만큼 앞서가는 동생 있는 곳을 향하여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습니다.

한참 후에야 마누라가 사라진 것을 알게된 호랑이는 아차 마누라가 굴을 탈출하였음을 직감하고는 큰일이 났다 싶어 밖으로 나오려 하니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어 쉽게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호랑이는 죽을 힘을 다하여 바위를 밀었으나 약간 흔들거릴 뿐 잘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도망가는 마누라를 잡아오려면 한시가 급한 지경인데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호랑이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을 떠올리고는 호랑이는 바위 전체를 떠밀 것이 아니라 귀퉁이 부분에 힘을 살짝만 밀어 몸만 빠져나갈 공간만 만들어서 겨우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 오누이가 손을 잡고 저기 산 밑의 강가의 배 옆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큰소리로 여보! 범례네(범례 엄마) 지금 어디를 가오. 얼른 돌아오지 않으면 나와 당신의 사랑스러운 딸은 살 수가 없소.” 하며 외쳤습니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호랑이는 새끼 범례를 두 손으로 잡고 쫙쫙 찢어서 죽여버렸습니다.

다시 여보! 범용이네. 당신 아들 죽는 꼴 볼 것이야. 속히 돌아오시오.” 외쳤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범용이 마저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남동생의 노력으로 누이 자신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비록 동물과의 사이에 난 자식이지만 자신의 소중한 피붙이를 잃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었습니다. 호랑이는 자신에게 은혜를 입힌 자에게는 어김없이 보은을 하지만, 자신을 해치거나 거역한 자에게는 가차없는 징벌을 내리는 영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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