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구렁이의 복수

옛날에 아들형제를 둔 집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평소에 집안일을 잘 도우며 근면성실 하여서 혼례를 치르고 분갈할 대 부모님이 이웃 마을 앞에 물길이 좋은 옥답(沃畓) 닷 마지기를 떼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논에는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집채만한 바위덩이가 영물이라 가물 때에 논주인이 바위 위에 올라 오줌을 한번 싸면 즉시 큰물로 변하여 논에 물이 가득 고이게 하는 보물(寶物)이었습니다. 6얼이 되어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갈이를 하여놓고 물을 가두려고 자주 논에 드나들며 아예 가래()를 놔두고 다니는데, 어느 날 오전 논을 둘러보러 갔을 때 그 바위 위의 볕이 잘 드는 쪽에서 어른 팔뚝보다 더 굵은 암수 한 쌍의 구렁이가 구불구불 엉켜서 교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논주인은 구렁이가 바위의 지킴이(업신)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왠 징그러운 것들이 아침부터 이상한 일을 벌인다냐고 하면서 논귀퉁이에 꽂아둔 삽가지래를 빼어들고 와서는 그것으로 한 마리의 구렁이 머리를 겨누어서 내려찍으니 구렁이 머리가 댕강 잘려졌고 그 머리를 들어다 논 옆 숲속에다 버렸습니다. 또 한 마리를 죽이려고 다시 가보니 그 놈은 바위틈으로 도망가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죽은 놈이 수컷이었다고 합니다.

구렁이를 죽인 논주인 아저씨는 의기양양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말동이 어매(엄마)! 내가 오늘 아침 우리 논에서 짝짓기하고 있는 구렁이 한 마리를 잡았는데 한 마리를 놓친 것 쏨해(아쉬워) 죽것네.”하며 자랑을 해대니, 마느래(마누라)당신 무슨 지악스런 짓을 했어요. 살아있는 것의 목숨을 빼앗고 더더구나 새끼를 가지려고 하는 동물을 해치다니 너무 지나쳤던 것 같소. 제가 보기에 그들이 아마 바위의 지킴이가 분명허요.”하고 나무랬어. 그래도 남편은 지킴이는 무슨 놈의 지킴이! 암것도(아무것도) 아니여.”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한 열흘 쯤 지나 말동이 아버지는 건너편에 잇는 자기 고향마을로 이태 전에 돌아가신 형님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오후 늦게 만큼 쌀 보자기와 술 한 병을 들고 집을 나섰대요. 자기 논배미를 지나 널따란 도랑에 이르니 웬 어여쁜 색시가 빨래를 하는데, 너무 고와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처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도 제사를 지내러 간다는 사실도 잊고 기어코 색시를 한번 만나보고야 말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말동이 아버지는 빨래터에서 좀 떨어진 산언덕의 소나무 밑에 앉아 그 여자가 바로 앞으로 돌을 던져 물을 튕겨댔으나 묵묵히 빨래만 하고 나서는 유유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말동이 아버지는 그 집을 유심히 보아두었다가 날이 저물자 그 집 앞에 찾아가 지나는 과객인데 하룻저녁 유숙하자고 부탁하니 순순히 그러라고 하였습니다. 남자는 방이 없으면 헛간에서라도 자겠다니깐 사랑방이 비어있다며 촛불을 켜주고 요까지 내어주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여자 한번 안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들어온 남자는 목이 마르지 않는 데도 안방에다 대고 주인아주머니 물 한 그릇 먹고 싶소.” 외치니 그 여자가 물대접을 들고 왔습니다.

남자는 마음이 바짝 달아 있어 물그릇은 팽개치고 그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으니 외간남자가 무례하게 남의 아녀자의 손을 잡고 겁탈하려 하시오, 당장 손을 놓으시오.” 하며 소동 끝에 방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한데서 자는 잠인데다 이상한 예감까지 떠올라 그 남자는 옷을 벗지 않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깊은 잠을 들지 못하고 눈만 감고 누워있으니, 문밖에서 --- ---’ 하는 으스스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몇 파례의 소리가 들린 후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수십 발이 넘는 구렁이가 방 네 귀퉁이를 휘감더니 용의 대가리 보다 큰 입으로 네 이놈! 네가 우리 서방님을 불귀의 객으로 만든 놈이지. 어디 한번 너도 나에게 고초를 겪으며 죽어봐라.”하며 그 긴 몸뎅이로 남자를 휘어 감기 시작하는데 굉장한 기세였습니다. 웬만한 남자 같으면 구렝이의 기세에 질려서 그대로 잡혀 죽었을 것일진대 이 남자도 보통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니가 죽냐 내가 사냐 사생결판을 했응께 말입니다. 독이 오른 구렝이와 건장한 남자가 죽을 힘을 다해 싸움을 벌이는데, 아무래도 사람의 힘이 딸리는 거였습니다.

이 순간 대비하려고 그랬는지도 몰라도 남자는 한복 윗도리 속주머니에 날이 퍼렇게 선 비상용의 칼인 비수(匕首)를 꽂아 가지고 다녔는데, 구렝이가 온몸을 휘어감고 올라와 조금만 지체하면 온몸이 꽁꽁 감겨버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그 남자는 신속히 비수를 꺼내어 입을 벌린 구렝이의 목구멍을 단번에 내려 찔렀습니다.

급소를 맞은 구렝이는 온몸이 파르르 떨며 힘이 빠지는 듯 하였으나 웬수같은 저 남자를 살려둔 채 죽어갈 수 없다는 오기로 구렝이는 목구멍 아픈 것도 꾹 참고 목구멍을 찌르기 위해 자신의 입안으로 집어넣은 남자의 팔목을 이빨로 덥석 물고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목구멍에 찔린 구렝이와 팔뚝을 물린 남자는 과다한 출혈과 뱀독으로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한편, 말동이 집에서는 큰집에 제사지내러 간다는 양반이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온 식구들이 말동이 아버지를 찾아나섰습니다. 말동이는 아버지가 지나간 길을 따라 추적해보기로 하고 길을 나서 자기 집 논 근처에 이르러 바위를 쳐다보니 갓이 올려져 있길래 가보았습니다. 몸서리쳐지게도 바위 위에 아버지와 구렝이가 사투를 벌이다 죽어있어서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알리고는 마을에서 인부 3명을 데려다 부친의 시신을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어메는 아들에게 죽은 구렝이도 우리논의 업신(業神)이니 잘 수습하여 산에다 곱게 묻어주도록 하였습니다.

사흘 후 남편의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나서 안주인은 그 날 저녁 곤하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소복을 한 예쁜 각시가 나타나서는 남편과 저의 장례를 치르느라 고생하셨어요. 내가 당신 가문의 3족을 멸하려고 독한 마음을 품었으나 당신이 워낙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당신 때문에 남편 하나만으로 끝내고 나머지 식구들은 살려주는 겁니다.” 하며 한 가지 부탁은 내가 죽은 날이 되면 꼭 잊지 말고 여느 사람들처럼 나물에 밥 한 그릇을 차려주어 젯밥을 얻어먹는 것이오. 그래야 당신 집안이 대대로 평온하며 복을 받습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의 각시는 죽은 암쿠렁이의 화신이었는데, 그 각시의 말대로 한 날 한 시에 죽은 남편과 구렁이제사를 꼬박꼬박 지내주니 자손이 벌죽하고(번성하고) 가문이 날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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