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마음 넓은 김삿갓

우리가 보통 방랑시인 하면 김삿갓을 떠올리죠. 그 양반을 김삿갓 김삿갓 하지만 본래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김병연입니다. 원래는 양반가문이었지만 홍경래난때 조부가 반군에게 항복했다하여 집안이 몰락하였습니다. 김병연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를 수 없는 처지에 크게 낙심하여 옷보통이 하나 들러메고 전국을 유랑한 것이었습니다. 넘치는 글재주와 특유의 풍자로 이곳저곳 다니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쉰밥신세 타령이나 서당풍경을 묘사한 이야기는 왠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깐 쬐끔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서 제사지내는 일을 가지고 두 사람이 언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제사때 제사상 앞에 세워두는 지방(紙榜:위패)이 있는데 그 지방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산골마을이라치면 한 마을에서 한문을 제대로 읽고 쓰고 할만한 사람이 잘해야 한 두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계약문서 같은 것은 번번이 그 사람들의 몫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을문(乙文=언문(諺文)을 그렇게 부름)이라하여 겨우 한글로 이름자나 쓸 정도였고 그나마도 가정형편이 곤란하고 남의 집살이나 하는 사람들은 기역니은도 모르는 까막눈이 허다했습니다.

인자 한문을 아는 집에서는 윗대조상 제사를 모실 때 번 듯이 题考學生府君 神位縣祖考學生府君 神位니 하는데, 겨우 한글만 아는 집에서는 한문위패를 쓸 수가 없으니깐 제사임자에 맞추어 가령 아버지 제사면 돌아가신 아버님 신위이렇게 제사를 수 년째 지냈었다 합니다. 물론이야 한문 잘 하는 집에 가서 써올 수도 있었겄지만, 제사가 한두번도 아니고 번번히 아쉬운 소리를 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글위패로 제사를 모시는 집에서 어느 해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데, 자정에 시작하여 새로 두 시경에 끝났습니다. 치제후 제주가 소변을 보러 마당으로 나오니 그때꺼정(까지) 한문 잘 한다는 영감이 안자고 책을 읽더랍니다. 그것을 보고는 이 남자가 . 영감님! 오늘이 제 부친 기일인데 건너 오셔서 제사음식 좀 드시지요.” 했습니다. 밤이 이슥한 시간이라 배가 출출하여 찾았갔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니 떡, 과일, 식혜같은 음식을 가져다 주어 같이 먹으면서 얼핏 제상위의 지방틀을 보니 위패가 한글로 돌아가신 아버지 신위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유교학문에 투철한 영감은 이것을 보고는 원 세상에 제 부모제사를 모시면서 위패를 저렇게 틀리게 쓸 수 있을까? 한문을 모르면 한글이라도 <현고학생부군 신위>라고 글자를 맞게 써야 할 것 아니여생각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당시만 해도 지방은 반드시 한문으로만 써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한글지방은 도저히 있을 수도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영감은 여보시오. 광식씨. 세상에 이런 위패가 어디있다요. 어느 정도는 격식을 갖춰져야 할 것 아니요. 저승의 고인이 화내지 않을까 걱정되오. 앞으로는 제대로 배워서 잘 좀 쓰시오.” 한마디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가만히 듣고 보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한학을 많이 했으면 한거지 자기가 뭐길래 남의 제사에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거든

그래서 인자 영감님,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사의 위패를 꼭 한문으로 써야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저처럼 <돌아가신 아버님 신위> 하면 얼마나 가직한(가까운) 느낌이 듭니까. 제 제사니깐 제 편리한대로 하겠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지요.” 하고 대꾸를 하였습니다.

다시 영감은 이봐. 광식씨. 관혼상제라는 것은 다 법도가 있는 거여. 자기마음대로 바꾸고 안 바꾸고 안 바꾸고 하는 것이 아니여. 내 말 깊이 알아들어.” 훈계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양반은 타시락거리며 서로 자기주장만 하였고 끝내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예도(禮度)에 밝은 학식이 높은 분이 나타나면 그 양반에게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판가름 내주도록 하자고 약조를 하고는 자리를 끝냈습니다.

이런 약속을 한지 석 달 쯤 지날 무렵에 김삿갓 어른이 이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마을 사랑방에 동네 어른들을 모아놓고 이런저런 좋은 담화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하는데, 이 양반이 참 아는 것이 많고 문자속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대한히 학문이 많이 든 유식자였습니다. 이래서 지난번 언쟁을 벌인 사람들도 이 양반에게 그 일을 말하여 판가름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조용한 곳으로 김삿갓을 불러내어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차례로 자기의 입장을 자세히 이야기 하니깐 조용히 경청하더니, 김삿갓은 제가 들어보니 한문으로 위패를 써야 한다는 분의 의견도 충분한 근거가 있고, 한글로 위패를 써도 된다는 분의 의견도 충분한 근거는 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일을 놓고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이치에 합당한 원칙을 바탕로 최종적인 결정은 그 일에 처한 사람이 주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 두 양반의 주장은 모두 맞습니다.” 이렇게 판결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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