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선행으로 생긴 발복(發福)

옛날에 어떤 마을에 남편도 없이 어여쁜 딸 하나만 데리고 사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손바닥만 한 땅돼기를 부쳐 먹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항시 먹을 것이 부족하였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기 위해 부잣집에 방아품을 팔러 다녔습니다. 일을 해주고 나면 그 집에서 품삯으로 돈 대신 싸래기(금이 간 쌀 : 싸라기 의 사투리)를 받아오곤 하였으며 이 싸래기로 밥을 해먹고 일부는 모아 두었다가 인근에 있는 절의 스님이 시주를 오면 시줏쌀로 주어왔습니다. 어느 해 봄날에도 인근 절의 대사가 시주를 받기 위해 들렀습니다. 스님들의 시주 포대는 대개 바랑 속에 서너 개 있기 마련인데 즉 쌀, 보리쌀, 찧지 않은 날보리 등을 구분하여 받습니다. 여느 집에서나 웬만큼 힘들어도 온전한 쌀을 주는 것이 보통이나 마침 이 집에 들렀을 때는 싸래기를 주기 때문에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포대를 댔는데 밑구멍에 뚫려있어 싸래기를 붓자마자 마당바닥에 쏟아져버렸습니다. 스님은 비록 싸래기일지라도 귀한 곡식이라며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하루 내내 바닥에 쏟아진 싸래기를 흙이 묻지 않게 일일이 주웠다 이겁니다. 스님이 싸래기를 다 줍고 나니 날이 어둑어둑하여 절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스님은 날이 너무 저물어서 그러는데 하루저녁 유숙하고 가면 어떨까요.” 하며 하룻밤 머물 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스님의 청을 어찌 따르지 못하겠소이까? 다만 방이 단방(1)이고 집이 워낙 누추하여 스님께서 불편해 하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될 따름입니다.” 하였습니다.

 

유숙을 승낙 받은 스님은 집안으로 들어서더니 안방의 윗목에 꿇어앉아

하루아침에 선공덕(善功德) 하니/ 일시에 무주공(無柱空)하여/

오시()에 꽃이 피어/ 그 꽃나무 왕나무 재목(材木)이 로다/

말년에 왕재목이 되었도다...” 운운하며 염불을 하는 겁니다.

[염불의 뜻은 어느 날 아침 좋은 공덕을 쌓으니/ 갑자기 대나무가 자라나서/ | 낮에 꽃이 피었는데 그 대나무 궁궐의 재목감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재목(왕비)가 될 것이다는 내용]

 

염불 말마따나 그 해 오월이 되니 이 여인의 집 부엌에 커다란 왕대 죽순이 솟아 올라오는데, 순간순간 자라는 것이 한나절 만에 지붕을 뚫고 하늘높이 뻗어 올라갔습니다. 점심때 무렵이 되니 그 나뭇가지 전체에 화려한 꽃이 피더니 얼마 안 되어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어떤 상서로운 징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아 그 꽃잎을 비단주머니에 담아 안방의 벽장 속에 걸어두었답니다. 한편 불공을 많이 드린 한 여인 집에 엄청나게 큰 왕대가 솟았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퍼지자, 이 고을에 사는 최부자라는 사람이 거기에는 필시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 것이다. 분명코 복()을 가져다주는 복나무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하면서 이 대나무를 2천 석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 사가지고 갔습니다. 이렇게 대나무를 사간 이후 최부자는 더욱 재산이 불어나 대나무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온 나라의 방방곡곡에는 커다란 방()이 나붙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 나라의 임금님께서 중대한 병환을 앓고 계신데 어떠한 약을 써도 전혀 차도(差度)가 없다. 만일 이러한 임금의 병환을 낫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라에서 큰상을 내리겠다. 특히,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천년에 한 번씩 나타나는 왕대나무의 꽃잎을 먹으면 어떠한 병도 나을 수 있다고 하는데 왕대나무 꽃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꼭 연락을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은 예쁘게 자라나서 방년 열아홉의 고운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고 모녀는 드디어 우리 집에도 뭔가 큰 영광이 찾아오는 전기가 마련되었다며 크게 고무 된 마음으로 왕대나무 꽃잎이 든 주머니를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한양의 대궐로 향하였습니다. 닷새 남짓 걸어서 한양의 궁궐에 당도한 모녀는 이러저러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궁궐관리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이들은 '이제야 우리 상감마마께서 회생하시게 되었구나'하고 기뻐하며 내전에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임금은 불편한 몸이었지만 기쁜 소식에 새로운 힘이 용솟음치면서 친히 이들 모녀를 궁궐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반갑게 맞이하면서 고마움을 표하고 어떤 상을 내렸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황송합니다마는 저에게 보시다시피 과년 한 여식이 하나 있는데, 하루 속히 좋은 배필을 만나 가정을 차렸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박한 소원입니다.'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임금은 부모 입장에서야 두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가장 큰 소망이겠지요.”라며 '어디 처자의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하였습니다. 여태껏 임금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처자는 수줍음을 머금은 채로 슬며시 고개를 들어 임금님을 쳐다보았습니다. 너무나 고운 자태에 임금은 그만 탄성을 질렀고 오가는 눈빛에서 찡한 느낌을 받은 임금은 이미 이 순간 이 처자를 자신의 새로운 비()로 점을 찍어 놓았습니다. 모녀는 자리를 물러 나와 궁궐로부터 금은보화와 비단옷감 등 많은 선물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도 못되어 궁궐에서 새로운 왕비로 결정되었으니 속히 채비를 차리어 입궐하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이 소식이 온 고을에 알려지자 우리고장에서 국보(國母)가 탄생했다며 온 고을이 축제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을 주민들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이들 모녀는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 도 한편으로는 서러운 마음이 드는 묘한 감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즉 딸이 왕비가 되어 좋기는 하나 젊은 시절에 홀몸이 되어 오로지 딸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왔는데 이제 딸을 떠나보내면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지 막막하였고, 딸 자신도 평생 자신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친정어머니를 놓아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이었지요. 그러나 임금의 명령이 곧바로 국법인 당시에 있어 시일이 닥쳐오니 그 딸은 떠나 갈 수밖에 없었고 화려한 궁궐에서 갖은 호사를 누리며 살게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항상 고향에 두고 온 친정어머니가 걸렸습니다. 속이 편하지 않은 나날을 서너 달 보낸 어느 날 저녁 왕비는 시름에 쌓여 어두운 얼굴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노래로 읊어 냈습니다.

 

임아 임아 고운 님아! 하늘같은 고운 님아!

열매만 살리려 말고 뿌리까지도 살궈내주소서

 

이 노래를 들은 임금은 여보 왕비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오. 도대체 무슨 소리 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소하였습니다.

그제야 왕비는 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첩에게는 늙은 모친 한 분이 계시지 않사옵니까? 저만 궁궐로 훌쩍 떠나와 소첩의 친정어머니는 매일 밤낮을 병고와 외로움으로 눈물 속에 홀로 지내고 계시옵니다. 나무에 뿌리가 있어야만 튼튼한 열매가 자라날 수 있듯이, 소첩이 뿌리인 모친은 모른 체하고 열매인 저 혼자만 어찌 호의호식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굽어 살펴주시옵소서하며 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임금은 왜 진즉 이 말을 하지 않았소. 하기는 이러한 상황을 헤아리지 못한 짐의 불찰이 크오. 마음속의 근심을 모두 털어버리세요. 내일 당장 도성부근으로 이주하시도록 하여 자주 뵈올 수 있도록 하겠소.”라고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왕비는 궁궐인근에 친정어머니를 모셔두고 가끔씩 드나들며 오랫동안 영화를 누리면서 잘 살았습니다. 친정어머니의 선덕(善德)에 의해 발복하고 딸의 깊은 효성으로 친정어머니가 충분한 보답을 받는 미담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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