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복을 타고난 영감

 

아주 오랜 옛날에 자식이 하나도 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렇게 노부부만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꽁생원인데 세상물정도 잘 모르고 그렇다고 자기의 생업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오로지 하는 것은 밤낮으로 책만 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멈이 마당에다 덕석을 펴고 곡식을 말리려고 널어놓고 장독대의 간장 항아리까지 열어놓고는 들판에 일을 허러 나갔는데 그 날 점심때 무렵 갑자기 하늘 이 시컴해지면서 한 무더기의 소나기가 몰려와 곡식과 장 항아리를 옴막(온통) 비를 다 맞혀버린 거였습니다.

아무래도 못 미덥고 시원치 않아 할머니가 돌아와 보니까 이 모양이니 할머니는 원 세상에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비가 오면 곡식을 채서 모으고 장독도 덮어야 할 것 아니요. 날이면 날마다 책만 보고 있으면 쌀이 나오요 돈이 나온다요. 손끝하 나 꼼지락 헐라고 생각조차도 않으니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요몹시 화를 내며, 바락바락 악을 냈습니다. 영감은 그래도 이렇다 저렇다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조사자: 우리 전라도말로 무랑태수(武郞太守)였구만요. 제보자: 말하자면 어느 집 개가 짓는다냐. 날잡아 잡숫시오 하는 것이제. 더군다나 이 일은 지금까지 격꺼온(겪어온) 수 백가지 일중의 하나일 뿐이여. 그렇다면 이 할멈이 얼매나 속을 썩히고 살아 온 것을 알 만 하것지요.]

그러고 저러고 책만 보아 오던 영감은 이 일이 있고도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 . 이제 때가 됐어하며 혼잣말로 어떤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다음날 일찍 영감은 할멈에게 나 오늘 긴히 어데 좀 다녀올 데가 있는데 며칠 걸릴텐게(테니까) 마음을 차분히 하고 지달치(기다리지) 말고 있으오하고는 집을 나서는 겁니다. 할멈은 늘고(항상) 집에만 붙어있던 양반이 느닷없이 길을 떠난다니까 황당하였지만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으로 생각하고 조심히 댕겨오시라고 배웅하였습니다. 남자는 여태까지 사주쟁이·점쟁이가 되기 위하여 주역과 각종 점성술에 대한 책을 혼자 나름대로 공부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역의 심오한 원리에 접근하지는 못하고 맨날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이어지는 육십갑자만 외는데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지요. 영감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길을 떠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뚜렷한 행선지도 없었고 단지 어설프게 익힌 점을 치는 솜씨를 실제 사람들에게 적용해보고 싶은 작은 욕심밖에는 없었습니다. 영감은 신작로 길을 따라 하염없이 가는데 마침 큼지막한 어느 동네에 도착하였습니다.

영감은 갑자기 많이 걸은 탓에 다리가 피곤하여 동네 부잣집 골목에 앉아 다리쉼을 하고 있는데, 부잣집 행랑채의 지붕위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니까 몽개몽개 나는 구나하며 조금 큰소리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마침 그 전날 저녁에 이 부잣집에 도둑이 들어 엽전 궤짝을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부자영감은 괘씸하기 그지없는 도둑을 어떻게 잡아낼 수 있을까 아침부터 고민고민 하던 차에 어디에선가 몽개로구나 몽개로구나” [실은 김이 몽개몽개 나는 구나'라는 말을 잘못들은 것임.]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몽개'라 하면 이웃마을에 사는 뚝심 세고 막되어 먹은 젊은 놈이 아닌가. 이놈이 간밤에 몰래 산을 넘어 와서 우리 집 보화를 훔쳐갔다고, 네 이놈을 잡아 가만두지 않으리라. 영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이 내가 도둑을 맞아 상심을 하고 있는 줄을 알고 내 고민을 해결해 준다냐고 반가워하며 골목 밖으로 나와보았습니다. 왠 허름한 영감 한 사람이 길옆에 앉아 있는데 점괘를 알아맞히는 능력이 보통이 아닌거라. 부자는 그 영감을 집으로 불러들여 밥에다 고기며 술이며 걸판지게 차려서 대접을 성대하게 하고는 집을 떠날 때는 그 귀하디 귀한 쌀(白米)까지 한 말 어깨에 들려 보내주었습니다.

영감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무심코 한마디 해 본 소리가 이렇게 큰 복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고 자기도 쬐끔은 신통력이 있지 않을까 우쭐대는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같은 영감이 자기를 도둑으로 지목한 사실을 쫙 퍼진 소문으로 알아차린 뭉개라는 청년은 '이런 고약한 영감 같으니라구. 늙은 영감이 나를 능멸해' 하며 그 영감이 지나갈 산고개의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한참 기다리니 오후 늦게야 영감이 쌀자루를 어깨에 들쳐메고 낑낑대며 올라오고 있는 거야.

몽개는 이 영감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이것 보시오! 영감님, 나하고 내기를 하여 이기면 그대로 쌀을 가져가시고 지면 쌀을 빼앗기는 겁니다.’ 큼지막한 양손 안에 두꺼비 한 마리씩을 보이지 않게 쥐고 있던 몽개는 영감에게 자기 손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워낙 큰손아귀라 그 속에 무엇이든지를 사실 모르고 있던 영감은 내가 당신 손 안에 든 것을 알고는 있으나 내가 맞춰버리면 분명 당신이 그 안에든 것을 내팽개쳐버릴 것 같아 차마 말을 못하겠소. 살아있는 것이라면 목숨을 잃을 것이 확실하오.” 하며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몽개는 잘못한 사람에게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는 그 영감의 넓은 도량과 이것 아니면 저것하는 식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고는 영감에게 백배사죄를 하였습니다. “저는 사실 의적(義賊)으로 부잣집의 재물을 뺏어다가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도적질이 나쁘다는 것은 알았지만 부자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적기 때문에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금일부터는 손을 털고 열심히 땀 흘리며 노력하여 살겠습니다.” 하며 몽개는 도둑생활을 청산하고 부지런한 농사꾼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영감은 방안퉁수 신세의 샌님에서 한 사람의 큰 도둑을 새사람으로 교화시키고 귀한 쌀까지 얻어왔으며 이제 제법 능통한 점쟁이가 되어 왠만한 점과 사주를 보는 점술가로 변신하였고, 이후로는 할머니의 속을 썩히지 않는 훌륭한 가장으로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백성들 사이에는 도둑도 넉넉한 집의 것을 가져다 먹으면 죄가 안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이는 서민들의 생활이 너무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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