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김덕령(金德齡)의 전설

가장 풍부한 북구의 인물전설은 김덕령 전설이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를 유형별로 분류하면 약 20여 종의 신화가 전승되고 있다.
⑴ 효심 두터운 천하장사
김덕령 장군에 관한 전설은 무등산 일대에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의 나이 열 살 되던 해에 충효리의 환벽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새를 잡기 위해 몸을 날려 뛰어오르더니 한 손으로는 처마 끝을 잡고 한 손으로는 처마 밑 새집을 더듬으며 한바퀴를 돌아 동리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효심도 지극하여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동복 석교촌(지금의 화순군 남면)까지 백여리 길을 매일 나는 듯이 내왕하여 엄동설한에 그곳 천어를 잡아 날랐다는 것이다.
또 어머니의 병이 위급할 때 진주의 신의라 알려진 김참봉 楠을 찾아 말을 몇 백리 길을 하룻밤에 달렸다.
그가 젊어서 하루는 무등산에서 뒤를 보다가 호랑이가 달려들자 한 손으로 호랑이의 목을 잡아 비뚤어 누른 채 일을 마쳤는데 그 호랑이를 온 마을 사람들이 가까스로 끌어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하루는 처가인 담양 봉산에서 논에 물고를 대는 농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놈을 잡아 지나가는 여인네의 호미를 빌려 엿가락 늘리듯이 늘려 손을 묶어 놓았다고도 한다.

⑵ 치마바위
충장공의 누님인 김응회 부인도 힘이 천하장사로서 원효계곡에 있는 치마바위는 김부인이 치마폭에 싸서 갖다놓은 바위라서 치마바위라 일컬어지고 있다.

⑶ 뜀바위
무등산 정상은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의 삼대로 형성되어 있다. 삼대는 어느 것이나 선돌이 즐비하게 솟아있어 기이하고도 장엄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지왕봉은 일명 비로봉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정상에 뜀바위가 있다. 김충장공은 어렸을 때 지왕봉 정상의 이 쪽 바위에서 저 쪽 바위로 뛰어다니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기르던 훈련장이었다는 데서 이곳을 뜀바위라 전해오고 있다. 왜정 때 이 전설을 들은 일본군 장교 하나가 나도 뛸 수 있다고 뛰어 내리다가 떨어져 죽은 일이 있다.

⑷ 문바위
무술훈련에 관한 전설도 다양하다. 지금의 송암동 옥천사 뒤 김당산 옥녀봉을 말을 타고 뛰어 넘으면서 애마를 조련했다는 전설이 있는가하면 무등산 문바위의 기사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무등산 지공너덜에서 주봉으로 가노라면 진조삭창의 왼쪽에 높은 돌기둥이 두 개 서 있고 그 사이로 통로가 있어서 이곳을 문바위라 한다.
충장공이 어려서 이 문바위에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곳인데 하루는 이곳에 이르러 백마에게 이르기를「내가 큰 일을 이룩하려면 백마야 너 또한 출중해야 하느니라.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이 화살이 건너편 마살리에 이르기 전에 네가 거기에 먼저 당도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치겠노라」고 했다. 백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살리는 문바위에서 30리 가량되는 화순땅인데 화살이 충장공의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말도 번개처럼 앞발굽을 하늘 높이 쳐들더니 마살리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갔다. 마살리에 도착한 김장군은 화살이 미처 날아오지 않자 화살이 먼저 와서 어딘가에 박혀있는 줄로 단정하고 약속대로 칼을 뽑아 백마의 목을 치려 할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제서야 화살이 휭하고 날아와 말 앞에 꽂히었다는 것이었다. 김장군도 장군이지만 말도 그에 못지 않게 준마였다는 전설이다.

⑸ 김덕령 장군의 체구
김덕령 장군에 관한 이러한 전설로 미루어 보면 몸집이 거구일법하고 또 실제「단구」이다「거구」이다 하여 이론이 없지 않았으나, 1974년 11월 19일 배재부락의 뒤에 있었던 충장공의 묘소를 충장사 안으로 이장할 때 그 체구가 비로소 확인되었다.
발굴한 관의 길이는 188cm, 너비 69cm, 높이 45cm이고 두께 7.5cm의 옻칠을 한 이중목관인 것으로 보아 안에 안치된 김장군의 시신은 5척의 단신임이 밝혀진 것이다. 김장군은 죽어서도 관안에서 가죽전포를 입고 있어 수천의 의병을 거느리고 국난을 극복해간 장군의 파란과 풍운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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