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복룡동의 솔무대기 유래

복룡동은 옆을 복자, 용룡자 인데, 용이 삼각산에서부터 흘러나와 가지고 이 앞에 가서 영산강 상류, 극락강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용이 드러누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냇물이 가까이 올수록 좋다고. 그런데 지금은 냇물이 늘 저쪽으로 흘러나가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마을이 창건된 지는 450년 전쯤 되요. 여그가 주로 금룡(금녕) 김가가 살았다. 여기에 102호 정도가 산다. 금룡 김씨가 제일 처음에 충청도 영동에서 나로서는 14대조께서 광주로 오셨단다. 노안면 금안동 뒤에 금정산 뒤에 그분 묘가 있는디 우리 마을이 원래 용이 드러누웠다 해가지고 우리 선로들이 제일 첨에 하남면에 가 계셨다가 일곡으로 이주해가지고 그 다음에 일곡서 교산이란 마을을 거쳐서 교산은 마을이 째깐해. 째깐하니까 여기 용이 누워있는 곳으로 옮겨가야 쓰겠다 해가지고 복룡으로 넘어왔다. 지금은 이렇게 팽창했지만은 옛날에는 이렇게 번창헌 마을이 아니여. 들은 좋다. 이 마을 앞에 한 100m 정도 나가면은 솔무대기란 것이 있어. 거기에 솔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곳이 쏘가 되어있는데, 예전에는 이곳이 극락강 상류라서 모래무지를 잡어가지고 지지다가 화재가 났다. 고기를 냇가에서 잡아다가 솔에 지지다가 불이 나서 이 마을 전체가 소실되었다. 그 때는 이렇게 마을이 번창하지 않았었다. 그 때 한 선각자가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이야기허기를 앞에 가서 화산이 보인다 했다. 화산이란 일곡의 뒷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임곡 용진산을 보고 여기서는 꼭 닭벼슬 마냥으로 보이는데 이 마을에서 오래 살려면은 화산이 못건네다 보이도록 막으라해서 앞에 숲을 만들었다. 한 20여년 전만 해도 큰 장정이 두 아람씩 되는 그런 솔이 이곳에 몇 그루가 쑥 서 있었다. 수백년 된 솔이 있었는데 경지정리 된바람에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솔나무가 얼마 없고 다 고목이 되어서 다 절단났다. 화산을 막아야 된다고 해서, 화산을 숲으로 막았기 때문에 마을이 성장하고 또 김씨들이 번창해서 여그서 자작일촌하고 살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도 나무를 없앨라고 해도 없애지 못한다. 화재가 난 후로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쯤 전에 그때 광주목사로 있는 신후석이 나라에 얘기해 전부 지원해서 다시 복구해 주었다. 그전에 비석등이라고 여기서 한 200m 나간데다가 목사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해가지고 마을에서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석이 없어졌다. 광주공원에다 광주근방의 각 지방에 유래있는 비석들을 옮겨갈 때 향교가는 앞으로 옮겨 가버렸다. 그 비석은 옛날 비석이라서 이끼가 끼고 다 마모되어서 잘 알아볼 수가 없는데, 어느 땐지 모르지만 한 300년 됐다고 얘기들 한다. 그래서 숲을 만들고 난 뒤로 불도 안나고 번창했다고 한다. 솔무대기란 곳 앞에서 바우도 크고 냇속에다가 100m 가량 바우가 깔렸어. 지금은 다 패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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