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정금남 전설

선조조의 충신인 금남군 정충신은 고려 말 바다의 명장 경렬공 정지장군의 7대손이다. 정충신의 자는 가행이고 호는 일운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사리분별이 여일해서 당시 광주목사이던 권율장군의 통인으로 있게 되었다. 하도 차분하고 재빠르고 대담하면서도 명석하여 어린애라고 해서 어른들이 소흘히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권율목사가 여섯 살 난 정충신의 지혜를 시험하고 싶었다. 그때가 여름인지라 문짝 위에만 돌쩌귀를 박아서 덧문을 아래서 문짝을 들어올려 높이 처마 밑에 선반처럼 걸어두었다.

권목사가 걸어 올린 문짝 위에 아무도 몰래 물을 가득 담은 그릇을 올려 두었다. 만일 누가 이 사실을 모르고 급히 걸어 놓은 문을 내리다가 물벼락을 맞을 판이었다. 이렇게 해 놓고서 권장군은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정충신을 급히 불러서 비가 와서 기후가 몹시 차니 급히 덧문을 내려 닫으라고 장황하게 일렀다.

철없이 놀던 아이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가는데 마루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광에 들어가 나무의자처럼 된 디딤돌을 가지고서 마루위로 달려왔다. 그런데 이 아이의 오른손엔 가는 대막대 하나가 들려 있었으며 그 불호령 속에서 차분하면서도 민첩하게 발판을 마루에 놓더니 그 위로 올라서서 문짝 위에 혹 얹혀진 것이 없나하여 대막대를 들어 문짝 위를 더듬다가 그릇이 걸리자 막대를 내려놓고 조심히 물그릇을 내려놓은 다음 문걸이를 벗겨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함께 목격한 관원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으며 권율 목사는 마음 속 깊이 이 아이의 장래를 점치고 있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는 어지러웠으며 임금은 난을 피하여 의주에 몽진하고 있었다.

해안과 내부 어디서고 왜군들이 들끓고 있어 각 전선에서의 보고가 두절되고 있었으며 권율목사도 군정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지 못해 마음이 조급한 판이었으나 믿고 보낼 사람이 없었을 뿐더러 누가 감히 목숨을 걸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안 정충신은 권목사 앞에 나아가 자기를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권목사는 깊이 생각한 끝에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사려가 깊고 영민해서 과연 큰 일을 맡길만하여 극비의 장계를 써서 정충신에게 건네 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이른 새벽에 막상 길을 떠나는 정충신을 보고 권목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소중히 간수하라는 장계는 몸에 지니지도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더벅머리 땔나무군 행색에 어깨에는 망태기 하나를 매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권목사에게 정충신은 바싹 다가가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이 망태기가 장계올시다. 봉서를 그대로 몸에 지니고서야 적진을 헤쳐 무사히 도착할 수 없겠기에 봉서를 길게 찢어 새끼를 꼬아 이 망태기를 엮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권목사는 정충신의 기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길로 정충신은 적진을 뚫고 권율목사의 사위이며 병조판서인 이항복 대감에게 무사히 도착했다. 망태기를 풀어 장계를 순서대로 다시 펴 이대감에게 올리자 한 눈에 이 소년의 비범하고 대담한 용기와 사람됨이 걸출함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여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거두어 들였다. 이대감의 배려로 정충신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계곡 장유, 지천 최명길 등과 친교를 맺었고 얼마 안 있어 무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13년에는 만포검사로서 청나라에 잠입, 적정을 탐지했으며 인조 원년에는 안주목사 겸 방어사를 역임했고, 이듬해 이괄의 난에는 반도들이 서울까지 쳐들어와 신왕을 옹립하기까지 했으나 정충신은 전부대장으로서 황주와 鞍峴서 이괄을 무찔러 하루만에 천하를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2등으로서 금남군에 봉해졌다. 그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연변 대도호부사를 역임했으며 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도원사에 이르렀다.

1633년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세폐(歲幣)가 날로 증가하는데 반대하여 단교사신을 파견하자고 했는데 정충신은 이에 반대하다가 당진에 유배되었고 다시 장연에 이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이듬해에 포도대장을 역임한데 이어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있다가 인조 13년 4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학문에도 깊이 골몰하여 「일운집」「금남집」「백소북천록」등의 저서가 있다. 동명동 73번지에 공을 제향하는 경렬사가 있었으나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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